진주임씨(晉州任氏) 우강(牛崗) 족보(族譜)
진주임씨(晉州任氏) 우강(牛崗) 족보(族譜)
晋州任氏는 溫(온)을 1世로 시작되며 풍천임씨(豐川任氏) 10世인 이조정랑(吏曹正郞) 헌납(獻納) 임형(任衡)은 여말 선초의 인물로 초명은 충(衝)이며, 호는 죽곡(竹谷)이요.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고려 말엽에 문과에 급제하여 을 역임하였고 고려의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함에 벼슬을 그만 두고 경남 진주의 수양산에 은거하여 두분 불출한 선조로 진주(晉州) 임씨의 근본적 시조로 본다. 조성에서 누차 벼슬을 내려 부르고 방촌(尨村) 황희(黃喜)가 함께 새 조성에 나아가 일하기를 권유하면서 이르기를 "어디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 하니 공이 답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요" 하고 하면서 절의를 지켜 수양산에서 기거하며 옛 임금을 사모하다가 끝내 생을 마치고 사후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렸다. 공이 진주에 은거함으로서 자손들이 그 곳을 관향으로 두고 있으며 족보의 진원은 1752년(영조28년)에 22 代 先祖 이신 道濡(도유)께서 진주任씨의 族譜를 創刊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강(牛崗) 임석우(任錫佑)
우강(牛崗) 임석우(任錫祐)는 헌납공(獻納公)자손 숙계공파(淑溪公派) 진주임씨(晉州任氏) 28世孫으로 아호(雅號)는 석재(錫在)이며 호는 우강(牛崗)이다. 1920年 陰曆 7月 10日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와룡리에서 건숙(建淑) 임경교(任敬敎)와 義陵參奉 朴濟相의 女 潘南朴氏 사이에서 태어난 二代 獨子이다. 우강(牛崗)은 어려서부터 孝心이 지극하고 學文이 뛰어났으며 書藝에도 能通하였다. 일제강정기 高山公立保統學校를 卒業하고 1939年 崔斗鎭의 長女 永順과 婚姻하여 膝下에 6男3女를 두었다.
우강(牛剛)은 6.25 徵用 勞務者로 끌려가 갖은 苦痛을 겪고 被接한 상태로 子女가 있는 全北 完州郡 更川面 龍伏里로 돌아와 빨찌산들의 侵入을 막기 위한 警備隊員으로 勤務를 했으며 地域의 龍伏老人中央會 會長으로 一任을 다하였고 成均館儒道會 高山支部長과 高山鄕校會長을 歷任하고 1998年 陰曆 10月 25日 別世하였다. 우강(牛崗)이 故하던 추운 겨울날 喪家 일대에 천둥이치고 우박과 소나기가 내리는 怪異한 現像이 일어난 것에 地域住民들은 德望이있어 死後에도 좋은 일을 할것이라 稱訟하였으며 우강(牛崗)의 子女들은 1년간 朔望을 치루었다.
진주임씨(晉州任氏) 우강(牛崗) 가족(家族) 직계보(直系譜)
任溫(1世) - 任可珪(2世) - 任備(3世) - 任徒(4世) - 任天裕(5世) - 任樹(6世) -
任子松(7世) - 任德生(8世) - 任乙馹(9世) - 任衡(10世) - 任有度(11世) -
任秀賢(12世) - 任光雨(13世) - 任天洙(14세) - 任尹聖(15世) - 任暹(16世) -
任泰元(17世) - 任碩老(18世) - 任得陽(19世) - 任世圭(20世) - 任商礪(21세) -
任道洙(22世) - 任殷五(23世) - 任希大(24世) - 任元模(25世) - 任憲國(26世) -
任敬敎(27世) - 任錫佑(28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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