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晋州任氏)의 유래와 역사

임화영 2020. 8. 13. 16:04

진주임씨(晋州任氏)의 유래와 역사

 

 

 

 

진주임시종친회

 

 

 

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는 풍천임씨(豊川任氏)와 같은 임온 (任溫)을 보계하고 ()6세손(世孫)()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대()에 와서 백파(伯派:자송)와 중파(仲派:자손)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자송(子松)은 백이정(白以正)의 문인(門人)으로 조적(趙積)의난()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下府院君)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자송(子松경유(景儒), 덕유(德儒), 덕수(德壽), 덕생(德生) 4형제를 두었으며 四男인 문하시중좌복사 晉州君 덕생(德生)孫子諱衡이다.

 

 

 

진주임씨 시조 임형의 墓

 

 

 

 

임형(任衡)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인물로 초명은 충()이며 호는 죽곡(竹谷)이다. 고려 말엽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헌납(獻納)을 역임하였고 이조 태조(太祖)가 들어서자 벼슬을 그만두고 경남 진주(晉州)의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고 형()으로 개명하였다. 방촌(尨村) 황희(黃喜)가 함께 새 조정에 나아가 일하기를 권유하면서 이르기를 "어디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 하니 공이 답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요" 하고 하면서 절의를 지키며 옛 임금을 사모하다가 끝내 몸을 마쳤다. 사후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고 공이 진주에 은거함으로서 자손들이 晉州를 관향으로 두고 임형(任衡)을 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始祖)로 삼고 있다.

 

 

 

진주임씨 시조 임형을 배향하는 선모재

 

 

 

 

진주임씨(晉州任氏)6개파로 분파(分派)되어 있으며 모든 문중의 행사는 함께 진행하고 있다. 12世 官承議郞 諱임수현(任秀賢)四兄弟 長男 諱임광보(任光輔)无后하고 次男 諱임광좌(任光佐)를 익산파조(益山派祖), 彰信校尉副司三男 諱임광우(任光佑)는 고산파조(高山派祖), 生員 行參奉 四男 諱임광필(任光弼)를 전주파조(全州派祖), 15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낸 임윤성(任尹聖)의 둘째아들 임진(任進)을 관동파조(寬洞派祖), 18世 諱임동로(任東老)를 김제파조(金堤派祖), 19世 諱임득망(任得望)은 논산파조(論山派祖)로 모시고 있으며 지역 分波로 이루어졌다. 시조 임형(任衡)는 전주시 완산구 정여립로 석산에 모셔져 있으며 입구에 진주임씨(晉州任氏) 후손들에 의해 2016년 선모재(先慕齋) 건립하고 매년 한식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整理=晉州任氏29世孫 和永 再拜槿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