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晉州任氏(진주임씨) 淑溪(숙계) 任尹聖(임윤성) 行狀(행장)

임화영 2020. 8. 19. 11:49

晉州任氏(진주임씨) 淑溪(숙계) 任尹聖(임윤성) 行狀(행장)

 

 

 

行狀(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명하게 써서 보는 이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직접 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사명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행장은 전기(傳記)보다는 잡다한 이론을 피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며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여 후일사관(史官)들이 역사를 편찬하는 사료 또는 죽은 사람의 명문(銘文)이나 전기 등을 제작하는데 자료로 제공한다.

 

 

임윤성(任尹聖)과 구대우(具大佑) 전북 완주군 고산이 같은 고향이고 같은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남달리 가까웠으며 임윤성이 세 살이 많았으나 친구로서 친분이 두터웠다. 임윤성(任尹聖)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이율곡(李栗谷) 문인(文人)으로 호()는 숙계(淑溪)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구대우(具大佑)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호()는 취은()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인동(仁同), 예산(禮山)의 현감(縣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재수된 인물이다. 임윤성(任尹聖)62세에 거창현감(居昌縣監) 현직에서 작고하자 온 고을이 놀라음 금치못하고 당시 59세 친구 구대우(具大佑)가 임윤성의 행장을 쓴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숙계 임윤성을 배향하는 천곡서원

 

 

 

 

조산대부행 거창현감 숙계 임공 행장 (朝散大夫行居昌縣監淑溪任公行狀)

 

 

()()()이요. ()尹聖(윤성)이요. ()商卿(상경)이시니 晋州人(진주인)이라 麗朝左僕射門下侍中(려조좌복사문하시중) () 德生(덕생)은 곧 ()七代祖(7대조)이시며 六代祖(6대조)()乙馹(을일)이시니 左尹(좌윤)이시며 五代祖(5대조)()()이요 ()竹谷(죽곡)이시니 前朝獻納(헌납)벼슬을 하시다가 我太祖에 이르러 여러번 부르시되 나가지 아니 하셨으니 그 빛내신 큰節介(절개)國史에 실리시고 文集世上에 행하시다. 高祖()有度(유도)시니 敦勇校尉(돈용교부)시며 曾祖(증조)()秀賢(수현)이시니 承議郞(승의랑)이며 ()松亭(송정)이시다. 王考()光佑(광우)시며 彰信校尉(창시교부)副司直(부사직)을 하시다 ()千壽(천수)시니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厚陵參奉하시었다.

 

 

()의 성품이 本末이 침착하시고 사람으로 더불어 사귀어 놀기를 기꺼이 하지 않으시고 에 또한 아담하시나 로 지으심이 적어 世上에 전함이 없으시며 항상 子孫에 경계 하시되 악한일을 하야 선조에게 되게말라 하시다 淑夫人이시니 海美張氏이시며 通德郞 巘의 따님이시니 또한 어진 婦人이시다.

嘉靖丁未 四月 二十日 卯時高山소남동에서 탄생하셨다. 어려서부터 聰明하고 일찌기 글읽기를 좋아하고 희롱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아이들과는 유별이 長成함에 이르러 안으로 집안일을 돕고 살피시며 사치를 버리시고 實在하시며 孝道하고 恭敬하며 忠誠하심으로 항상 몸가짐을 모범적으로 하시고 學文全力하며 소소한 재주를 즐겨하지 않았다. 性品純孝하시어 父母가 병세에 계시면 반드시 몸을 代身하여 하나님께 빌며 아침 저녁으로 진지를 반드시 때를 따라 드리시되 먼저 맛을 보시고 춥고 더움을 父母의 몸에 맞게 하신 뒤 마음을 놓으시며 비록 죽이라도 父母님의 입맛에 맞게 하시고 항상 깃거운 기색으로 父母님을 모셨으니 마을 사람들이 항상 至極孝子라고 칭찬하였다.

 

 

萬曆己卯(만력기묘:1579)生員 三等하시고 參奉公이신 父親命令으로 成均館往來하시다 三年을 지나 辛巳二月에 어머님의 病患이 위독하여 거의 사경에 이르시니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입에 넣어들여 回生하시었다. 또 그해 十一月에 어머님이 侍病을 알으실 때 의원을 불러 처방을 물었는데 생가물치가 아니면 다시 좋은 약이 없다 하였다. 때는 마침 嚴冬雪寒(엄동설한)이라 눈과 얼음이 굳게 얼었는데 이 앞 냇가에 가셔서 울며 하늘에 祝願하시며 손으로 얼음을 깨니 한자나되는 얼음이 스스로 깨어지며 생가물치가 뛰어 나와 집으로 가지고 와서 다리어 어머님께 들게 하셨는데 病患이 곧 나았다. 그해 十二月 初二日에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이 하늘을 부르짓고 땅을 치며 통곡하시니 눈물이 흘러 피가 나셨으며 듣는 사람은 모두 孝心이 일어나며 보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없었다. 아버님이 항상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너무 슬퍼함을 억제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 로부터 아버님의 마음을 받들어 外面으로는 과히 슬퍼함을 가리시고 속 마음으로 쓰라림을 참으시며 三年居喪禮制로 하시고 을 마침시고 아버님의 으로 成均館往來하신지 十餘年이 되어 壬辰倭亂하시니 儒生을 따라 호종하실 때 當時 左議政(좌의정) 柳成龍(유성용)承文院(승문원) 提調(제조) 李延龜(이정구)應敎(응교) 申欽(신흠) 諸公이 본래 孝悌學行(효제학행)文章材德(문장재덕)이 있으며 剛明正直(강명정직)하시고 정치할 才略이 겸비한 사람이라 하고 임금님께 천거하사 宣務郎(선무랑) 벼슬을 받으시었다.

 

 

丙申 九月濟原察訪(제원재방)을 지내시더니 마침 외간상을 당하사 거상하는 범절을 보다 나 더 하시며 三年을 시묘 하시며 한번도 집에 돌아 오시지 않으시고 너무 슬퍼하시어 몸 보존을 하지 못함이 累次(루차)하셨다. ()을 마침에 임금의 부르심을 여러번 하시니 己亥七月에 전설사별좌(典設司別坐)를 하시고 또 선교랑(宣敎郎)을 지내시며 辛丑正月司導直長(사도직장)을 하시고 八月承訓郎(승훈랑)을 하셨으며 壬寅二月承訓郎에 승직하시고 三月奉議郞(봉의랑)을 지내시며 四月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하시고 七月에 봉직랑(奉直郎)으로 승직하셨다.

癸卯五月에 벼슬을 사양 하고 故鄕으로 돌아와 선인의 헌집을 고쳐 人才를 양성하시되 간간히 금서를 즐겨 하시며 餘生을 보내시더니 戊申六月慶尙道 (경상도) 居昌縣監(거창현감)을 배관 하실 때 이 슬픈 빛으로 말씀하시길 父母님이 돌아가시어 奉養할바 없고 또 내나이 六旬이 지나 忠誠을 다 할길이 없으니 이는 도 못하고 도 못함이라 하셨다. 就任(취임)을 고사하고 계시더니 때마침 임금님의 권고가 간절하고 역마를 보내시어 就任하시기를 재촉하는 로 뜻을 강작하야 就任을 한즉 난리 끝에 새로 한 꼴이라.

 

 

縣監(현감)에 부임한 居昌고을에는 글 읽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거늘 大小老人을 모아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되 나라의 운이 不幸하여 倭賊(왜적)이 들어왔으니 多幸히 임금님께 은혜를 입어 난리를 정돈하여 東方이 겨우 平安하나 하느님이 도우시지 않아 百姓이 먹을것이 없고 天災하여 살길이 없으니 새 임금이 聖明(성명)하사 周召(周公召公이니 정치 잘한 임금)의 다스림을 보게 되었으니 슬프다. 諸君(제군)들은 各各 農業을 힘써 父母奉養함을 잊지 말며 子孫敎育에 힘서 職業을 받게하라 하시고 이에 農事 연구교재를 짓고 呂氏鄕約(가정과 향토의 질서를 바로 잡은 글)諺解로 번역하여 주며 말씀하시되 슬프다 제군들은 내 말을 잘 들을 지어다 사람이 태어나매 賢愚(현우)의 구별이 없는 것이 있고 가르치고 안가르친대 있으니 임금께 忠誠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父母에 효도하며 어른께 恭敬함은 人倫에 제일 큰 일이라. 先見後見을 깨우쳐 주고 先知後知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본래 잘 알고 능한 사람이니 드믄 것이라.”

 

 

또한 學問은 비록 行世餘事(여사)라 하나 平安히 살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운지라 슬프다. 그대들은 이 책을 자제들에게 주어 습득하라.” 하시고 小學 한질까지 주시며 한사람도 알지 못함이 없고 한사람도 가르치지 않음이 없어 오늘에 할 일을 하면 明日에 할 일을 얻어 書籍가운데서 聖人發明한 뜻을 본떠 행하며 사람의 한가지 어진 행동을 보면 내가 얻은 듯이 하고 사람의 한가지 악한 일을 들으면 내가 잊은 득이 생각하며 하늘에도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이 집안을 닦고 世上하여 점점 君子의 지경에 이르면 비록 君子가 못될지라도 착한 사람은 되나니라.

 

 

또 옛말에 이르되 黃金이 그릇에 가득 차 있으나 아들에게 한권의 경을 가르침만 같지 못 하다 하셨으니 아름답다 이 말이여 옛사람이 어찌 나를 속이리요 하시고 大學에 또한 말 하되 사람이 준수한자 다 太學校에 들나 하였으니 자제들로 하여금 이글을 배워 先王을 알게하여 우리나라에 많은 人材를 양성하게 함은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그대들은 모두 힘쓸지어다 하시고 또 孝子節婦(효자절부)行動(행동)잘하는 사람을 찾아 을 주시고 아랫사람들을 보호하되 恩惠(은혜)로 하시며 몸 가짐을 청렴하게 하시니 風化가 온 고올에 떨치어 힘입게 됨에 사람마다 父母에게 孝道하고 일가간에 자애롭고 마을에 화목하며 公法을 두려하며 農事를 힘쓰니 향민이 원님의 늦게 오심을 탄식하더라 人材가 있으면 추천 하시니 頌德(덕을 칭찬함)하는 말이 자자하여 이웃골까지 뻗치더라.

 

 

이 부임한지 몇 달이 되어도 罪人을 때리지 않고 좋은말로 孝休(효휴)하여 罪人으로 하여금 스스로 反省케 하시고 항상 문을 닫고 글을 읽으시며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며 매사에 다달아 精明하시어 말하기를 에 모든일을 분변하며 아전이며 백성들이 심복치 않음이 없더라. 그럼에 욕심 많은 사람이 청렴하여지고 사나운 사람이 어지러워저 서로 경계하여 법에 범치아니하고 거의 대화의 希望이 있더니 불행히 그해 十一月 七日病患으로 官舍에서 돌아가시니 享年六十二歲. 病席情神不變하시고 醫員에게 謝禮하시되 나의 병은 가희 나을자 없으니 수고를 많이 하지말라 하시고 아들 을 돌아봐 말씀하시되 염습의 절차를 준비하여 에 의하여 先塋곁에 安葬하여 나로 하여금 선조를 모시게 하라 하시니 이 답하여 말씀하되 神色如前하심에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말씀하시길 죽고 삶은 떳떳한 이치라 聖賢도 면치 못하거든 나는 人事에 다하였으니 어찌 유감이있으리요. 오늘은 내가 죽는다 하시더니 과연 그 말씀과 같도다. 그 고을 백성들이 男女老少없이 모두 와서 護喪하되 親戚과 같이 여기고 여러날 가지 않으며 兒童과 종들까지 참여하여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말하되 우리 고을이 이 없어 어진 어른이 돌아가셨다 하더라.

 

 

發靷하는 날에 한 고을에 종유하던 선비와 風化欽慕하던 사람들이며 심지어 촌민까지도 다 모여 울며 致奠(치전: 혼령 앞에 술잔을 올리는 예절)하고 슬픔을 다하며 輓詞(만사)를 드리고 또 功德碑를 세우고 칭찬 함을 입으로 다하지 못하더라. 十二月에 집에 돌아와 殯所를 정하였다가 己酉年正月 二十三日高山 내관동 先塋下向丙原安葬하시었다. 令人海州吳氏判書億齡의 따님이시오 贈判書鵬孫女이시다. 嘉靖(가정)庚戌十一月一日에 출생하시니 性品溫順하고 慈惠로우시며 出嫁하신 로 웃어른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시었다. 夫人道理에 맞게 하시며 몸이 비록 귀하시나 자만심을 두지 않으셨다. 二男一女를 낳으셨으나 長男이시니 아드님 하나 두셨으나 아직 어리시고 次男이시니 一男一女를 두셨으나 다 어리시다.

 

 

性品順厚하시고 禮貌(예모)豊厚하시며 孝道로써 부모님을 섬기시되 평생 얼굴빛을 히 하심을 힘쓰시며 너그럽고 法道있게 하셨으며 和順하되 外度에 흐르지 않으시며 古禮를 지키되 고집스럽지 않으시며 風俗을 따라 하되 혼잡치 않했으며 사람을 함에 마음을 열러 숨김없이 하시며 일에 함에 평탄하시며 한 사람과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對接하시기를 개을리 하지 않았으며 웃는 말씀으로 親節하게 하시니 손님이 집에 가득하며 모두 기거함을 얻게 하시도다. 사람이 싸우는 가 있으면 마음을 열어주고 을 펴서 좋은 말로 달래시니 사람이 그 精誠感動하여 하는 가 많아서 비록 그 라도 그 악을 들어내지 못하였으며 혹 풍속을 문란하는 무리도 生覺하면 반드시 얼굴빛을 붉히고 뉘우치지 않는 없더라.

 

 

百姓에 빠지고 혹 患亂에 빠지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救濟하며 살기를 마련해 주시고 치 못한 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感化되게 함이 항상 이같은 居昌院 就任하실 때 그 고을 백성이그 어머니에게 不孝하여 그 어머니로 하여금 집에 들지 못하게 하여 軍慕에서 잤다 하거늘 이에 人馬를 보내어 데려다 上座에 앉히고 厚謝하고 射禮하며 가로되 네가 이런 벽지에 나서 능히 父母에게 孝道하고 마을에 和睦(화목)하는 를 알아서 居處飮食(거처음식)은 박하게 하고 너의 어머니 處所에는 분벽사창에 좋은 자리를 깔고 좋은 이불을 주며 좋은 飮食四時로 때를 맞추어 奉養한다 하니 참 진실로 世上에 드문 孝子로다 또, 洞里에 살 때 有無間에 서로 도와주며 어려움에 서로 규제하며 老人을 늙은이로 모시고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하여 도리에 거슬림이 없다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번 들으면 누가 恭敬치 않으며 나 또한 欽仰(흠앙)을 이기지 못하여 너를 하여 한번 보고 싶었다 하시고 酒饌(주찬)을 잘 갖추어 놓고 먹으라 하심에 그 사람이 등에 땀이나고 히 먹지 못하거늘 이 간절히 말씀하시기를 이사람이 먹지 않은 것은 과영 그 어머님을 생각하며 그러함이라 하시고 주찬(酒饌)을 싸서보내라 하시니 그 가람이 황송히 절하고 문밖에 나가 바로 군모(軍募)로 가서 그 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居處飮食에게 대접받은 것과 같이하고 봉양하기를 더욱 돈독하며 이웃 마을에 화목하기를 또한 이 깨우쳐 주신 바와 같이하여 구제하기를 더욱 부지런하니 만일 이 떳떳한 어진 마음이 아니면 어찌 이같이 사람을 만들었으리요.

 

 

學問하실 때 선비가 많아서 名望(명망)이 조정(朝庭)에까지 빛나시었다. 젊어서부터 小學 읽기를 좋아하시고 사람을 하여 말씀하시길를 修身節次(수신절차)가 다 여기에 있으니 今人이 이글을 읽지 않으면 人道를 알지못하여 집에 있을 때 어찌 父母를 섬기며 나라에 나아가 어찌 임금을 섬기리요. 六經의 깊은 뜻과 百家異說을 연구치 않음이 없이요연하게 흉중에 판단하고 사람가르치기를 반드시 뜻을 새움으로 먼저하고 위 몸소 하기를 힘써 모든일에 차서가 있어 장 달래기를 게을리 아니하시며 사람의 자격에 따라 가르치시되 지성으로써 하고 그 講論하실 때에는 精微(정미)함을 分析하고깊은 뜻을 다 연구하며 조리있는 말로 표현하여 사람이 發明치 못한 것을 發明한 저서가 많으시다.

 

 

일찍이 栗谷先生님을 洪龜祥(홍구상)집에서 뵈올 때 의심이나고 어려운 問答(문답)言語動作(언오동작)과 지식이 조금도 구차하고 막힘없이 없거늘 선생님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씀하시되 ()()博識(박식)盛德君子(성덕군자)로다 어찌 서로 보기가 늦었는고 하시고 칭찬하심을 맞이않으시었다. 그후에 ()中庸大學(중용대학)의 깊은 뜻을 先生(선생)의 말씀으로 註書(주서)를 쓰고 또 ()의 뜻을 붙여 선생에게 보낼 때 선생이 보기를 다 하시고 칭찬하며 ()히 한 책을 만들어 이름을 問答庸學(문답용학)이라 함이 ()하다 하시었다.

 

 

그후에 왕래하시며 講論(강론)할 때 매양 성리에 관한 말이 있으면 선생이 반드시 ()에게 質問(질문)하시니 ()上庠(상상)()하실 때 柳相公(유상공)成龍(성룡)이 당시 大司成(대사성)으로 成均館(성균관)에 와 六經(육경)의 깊은 뜻과 理氣(리기)의 미묘함을 강론할 때 명확히 답하시니 相公(상공)이 심히 경중하게 대우하셨다. 그 후에 相公(상공)栗谷先生(율곡선생)을 모시고 당시 인물을 議論(의논)할 때 相公(상공)()으로써 말하되선생이 허럭하시고 이사람을 속히써서 그 재덕을 시험한이 가하다 하시었다. 그 후에 相公(상공)推薦(추천)함은 이 연유로 됨이라.

 

 

壬辰年(임진년) 二月(이월)()의 그 아우 呂聖(여성)으로 하여금 父母(부모)를 모시고 眷率(권솔)을 데리고 鳥竹島(조죽도)로 보내시고 ()이 곧 한양에 가서 成均館(성균관)()하시더니 四月 變亂(변란)成均館(성균관) 유생으로 扈從(호종)하셨으니 만일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아니면 어찌 권솔을 옮기고 한양에 가셨으며 만일 ()忠節(충절)이 아니면 그 권솔을 두고 임금을 쫒아으리요. 그 높은 忠孝(충효)와 그 높은 節槪(절개)는 여기에 ()히 알것이니 孝道(효도)를 옮기어 忠誠(충성)을 한다는 것은 ()히 이사람을 말함인즉 휼륭한 材德(재덕)으로 國家(국가)에 크게 빗내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天命(천명)이로다. 구대우(具大佑)()() 商卿(상경)으로 親節(친절)하였더니 돌아가신 후에 그 아들 ()이 와서 대우(大佑)에게

行狀(행장)을 말하거늘 대우(大佑)竹馬故友(죽마고우)其世德(기세덕)內外德行(내외덕행)을 잘 아는 고로 굳이 사여ᅟᅣᆼ타 못하여 그 譜牒(보첩)에 실림과 平日(평일)듣고 본 것을 대강 記錄(기록)하여 ()을 짓는 사람의 자료가 되게 하노라.

 

萬曆己酉三月旣望禮山縣監 能城 具大佑 謹撰

(1609316일 예산현감 능성 구대우 근찬)

 

 

이 글을 쓰면서 숙계공(淑溪公)孝心이 남다른 분이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손가락을 짤라 모친께 수혈을 했던 모습과 간절한 마음으로 한자나 되는 얼음을 손으로 깨고 생가물치가 뛰어 나와 다려서 드시게한 逸話說話 같은 感動을 주었다. 縣監으로서 百姓들과의 친화적이고 마음을 깨우쳐 주는 현명함과 슬기롭게 행하는 마음이 어찌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숙계공에 대한 성품과 인품을 면밀히 기록해 주신 취은(醉隱)대우(具大佑)선생님께 숙계공의 후손으로서 재배하고 감사를 드린다. 취은(醉隱)대우(具大佑)의 배향은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율동재(栗洞齋)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 子孫들이 향사하고 있다.

 

 

 

 

 

 

 

 

 

 

淑溪(숙계) 任尹聖(임윤성)14世孫 和永(화영) 再拜槿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