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곡서원(泉谷書院) 향사(享祀) 진설법
천곡서원(泉谷書院) 향사(享祀) 진설법
천곡서원(泉谷書院)의 가장 큰 행사로 매년 음력(陰曆) 2월 15일에 향사(享祀)를 한다. 본래 고산향교(高山鄕校) 유림(儒林)들을 비롯하여 각계 기관장들과 진주임씨대종회(晉州任氏大宗會)에 의해 해마다 진행하고 있었는지만 2020년부터 코로나19의 사회적거리두기에 동참하여 진주임씨대종회(晉州任氏大宗會) 임원(任員)들과 일부 종친들이 참석하여 향사(享祀)하였다. 전국의 서원들 향사(享祀) 방법과 진설법(陳設法)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천곡서원의 향사(享祀)와 진설법은 천곡단지(泉谷壇誌)단지에 기록된 내용으로 참고하여 안내하오니 참고하기 바란다.
입재일(入齋日)이라 하여 향사(享祀)일 전날 향사(享祀)에 참여할 헌관(獻官)과 모든 집사가 서원에 도착하여 임명된 헌관(獻官) 이외에 제사 진행 시 부문별로 임무를 맡을 사람을 뽑아 할 일을 맡기는 의식인데 이를 분정례(分定禮)라 하며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을 비롯하여 집례(執禮), 찬인(贊引) 등을 분정(分定) 한다. 분정(分定)에 따라 자리가 정렬되면, 찬자(贊者)가 사당 앞에서 재배하고 관세위(盥洗位)를 한 후 홀기를 부르면서 예(禮)를 진행한다.
행사는 헌관(獻官)들의 재배로 시작되고 초헌관(初獻官)은 신위(神位)에 향을 세 번 올린다. 초헌례(初獻禮)로 집례(執禮)의 안내로 초헌관(初獻官)이 잔을 올리면 집례(執禮)가 축문(祝文)을 읽는다. 다음은 아헌례(亞獻禮)로 찬인(贊引)의 안내로 아헌관(亞獻官)이 잔을 올린 다음 종헌례(終獻禮)로 찬인(贊引)의 안내로 종헌관(終獻官)은 주향 신위에 잔을 올린다. 음복례(飮福禮)는 집례(執禮)의 인도하에 초헌관(初獻官)이 대표하여 음복(飮福)하는 절차이며 망예(望瘞)라 하여 축문을 불태워 날리고 나면 집례(執禮)가 향사례(享祀禮)가 끝났음을 고한다. 찬인(贊引)의 인도로 각 헌관들이 퇴장하고 찬인의 재배(贊引)가 끝나면 본 의례(儀禮)가 모두 마무리된다.
천곡서원(泉谷書院)은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종리 샘골에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을 배향하는 서원(書院)이다. 백현서원(栢峴書院)은 1668년에 창건되어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3년 복설 되고 1922년에 재건된 백현서원(栢峴書院)에 임윤성(任尹聖, 1547-1608)과 조선 중기의 문신 구영(具瑩, 1584∼1663)과 함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나 1941년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천곡서원(泉谷書院)을 건립하여 임윤성(任尹聖)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였다. 백현서원(栢峴書院)에서 천곡서원(泉谷書院)으로 옮겨 위패를 봉안한 가장 큰 이유는 두 선생께 향사(享祀)를 하는 데 있어서 두 선생의 나이와 술잔을 올리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임윤성(任尹聖, 1547年生)이 구영(具瑩, 1563年生) 보다 37살이 위인데 헌작 순서가 바뀌었다는 의견충돌이 대립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진주임씨(晉州任氏) 후손들과 지방 유림은 인근 향교에 찬반을 묻는 통문을 보냈고 절차에 따라 두 선생을 나눠서 모시기로 하고 후손들은 지방 유림의 동의를 얻어 1941년에 현재 위치인 샘골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곡서원(泉谷書院)을 짓고 위패를 옮겼으며, 1972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강당을 창건하고 1993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묘(墓)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관동에 있으며 묘사(墓祀)는 매년 음력(陰曆) 10월 10일에 제(祭)를 올리고 있다.
淑溪公任尹聖14世孫和永 (010-4723-6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