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임윤성(任尹聖)에 대한 구대우(具大佑)의 만사(輓詞)

임화영 2021. 6. 1. 16:36

임윤성(任尹聖)에 대한 구대우(具大佑)의 만사(輓詞)

 

 

 

임윤성(任尹聖, 15471608)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상경(商卿), ()는 숙계(淑溪),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고,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고산면(高山面) 관동(寬洞: 옛날 고산현(高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이(李珥)를 만나 공부하였는데, 중용(中庸)책머리에는 율곡이 한 말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쓴 것을 보고 율곡이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하여 용학문답(庸學問答)을 펴내게 되었다. 1579(선조21)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시절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었는데 그의 박식함을 보고 율곡에게 빨리 등용하여 그의 재주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후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정(左議政)이었던 유성룡과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이정귀(李廷龜)와 응교(應敎) 신흠(申欽) 등이 그를 천거하여 선무랑(宣務郞)에 제수(除授)되어 유생(儒生)들과 함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 하였다. 1599년 전설사별좌(典設司別座), 선교랑(宣敎郞)을 거쳐 봉훈랑(奉訓郞),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봉직랑(奉直郞) 등을 역임하고 1608(선조41) 6월에 경상도(慶尙道) 거창현감(居昌縣監)에 부임하여 그해 11월 임지(任地)에서 별세(別世)하였다.

 

 

 

 

 

 

 

만사(輓詞)를 만장(輓章)이라고도 하며 만()이란 앞에서 끈다는 뜻으로 상여가 떠날 때 만장을 앞세워 장지로 향한다는 뜻에서 만장이라고 부르며, 망인이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하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친척이나 친구가 죽으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만가(輓歌)라고 했으며, 옆에 따르던 사람이 받아 기록한 것이 만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만사의 규격은 일정하지 않다. 오언절구와 오언율시 또는 칠언절구와 칠언율시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시체를 본떠서 장문시의 글을 짓거나 4자체로 쓰는 경우도 있다. 내용은 일반적으로 망인의 학덕, 이력, 선행, 문장, 직위 등에 대한 칭송과 망인과 자기와의 친분 관계 등을 표시하고, 평소에 다정하게 지냈던 일이나 특별한 일을 떠올려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기도 한다. 또한 자기와의 관계가 없고 친면이 없으나 평소에 존경하거나 흠모해 교제를 원한 사이에도 그 뜻을 밝히는 만장을 지으며,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만 그 죽음 자체를 슬퍼해 인생의 허무를 말하기도 한다.

 

 

 

 

 

 

 

취은(醉隱) 구대우(具大佑) 선생께서 쓰신 숙계공(淑溪公) 만사(輓詞)를 소개한다. 구대우(具大佑 1550~1631)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호()는 취은(醉隱)이고 본관(本貫)은 능성(綾城)이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인동(仁同), 예산(禮山)의 현감(縣監)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재수된 인물이다.

 

 

自動至老取深情 交契何殊管鮑名 (자동지로취심정 교계하수관포명)

漢北年年君放我 江南歲歲弟尋兄 (한북년년군방아 강남세세제심형)

溪邊每約同甘苦 亭上常言共死生 (계변매약동감고 정상상언공사생)

慟哭今朝攀莫及 山河千里隔幽名 (통곡금조반막급 산하천리격유명)

 

老大難忘故舊情 京鄕皆識兩人名 (노대난망고구정 경향개식양인명)

靑年交道眞朋友 白髮親情是弟兄 (청년교도진붕우 백발친정시제형)

 

相對林亭消日月 共衾溪舍過平生 (상대임정소일월 공금계사과평생)

何知此夜君先去 哭送雲山日未明 (하지차야군선거 곡송운산일미명)

 

欲寫吾君眞事績 文章學問豈云奇 (욕사오군진사적 문장학문기운기)

格天誠孝看何處 氷裏鮦魚自躍時 (격천성효간하처 빙이동어자약시)

 

縣監 具大佑 號 醉隱

 

 

번역(翻譯) : 任和永 (晉州任氏28世孫)

 

어려서부터 그늘진 것까지 깊은 우정을 가졌으니

교분이 어찌 관중과 포죽의 이름과 다르겠는가

한양에선 해마다 우리를 찾았고

고향에선 형보다 세 살 어린 아우였지

시냇가를 거닐 때 고락을 함께하자 약속했고

정자 위에서 담소할 때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건만

오늘 아침 통곡한들 잡을 수가 없으니

산하 천리에서 운명을 달리했네

 

늙고 보니 친구의 옛정이 잊기가 어렵고

경향 각지 모든 사람 우리 이름 기억하겠지.

청년 시절 참된 길로 사귄 친구였고

백발이 되어서는 친근한 형제였네.

 

숲속 정자에서 얘기하며 세월을 보냈고

시냇가 정자에서 같이 자며 평생을 보냈는데

이 밤에 그대를 먼저 보낼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통곡하며 보내는데 구름 낀 산도 햇빛마저 희미하네.

 

우리 그대 참다운 사적을 쓰자 하니

문장과 학문만을 어찌 기이하다고 말하겠는가

하늘을 감격하게 한 지성스런 효심과

어느 곳에 얼음 깨고

스스로 뛰어 오르는 가물치를 어느 때 볼것인가.

 

현감 구대우 호 취은

 

 

참고 취은 선생의 만사 마지막 구절인 格天誠孝看何處 氷裏鮦魚自躍時 (격천성효간하처 빙이동어자약시)는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천수(任千壽)의 재실(齋室)항승재(恒昇齋) 주련(柱聯)의 주련사 일부로 사용되었다.

 

 

(淑溪公14世孫任和永, 010-4723-6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