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晋州任氏) 파(派)는 없다.

임화영 2021. 12. 12. 10:48

진주임씨(晋州任氏) ()는 없다.

 

 

진주임씨(晋州任氏) 종인(宗人)은 이것은 꼭 알아야 하고 역사가 왜곡되어서도 아니 되기에 끝까지 읽어주시고 새겨야할 내용이다진주임씨(晋州任氏)1821년 도유(道孺) ()께서 족보를 창간하시면서 보서문에 진주임씨 종인들이 대부분 전북 익산, 고산, 전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고산지역 종인을 중심으로 단합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1959년 상중하로 발행된 족보(族譜)에서 갑자기 파가 등장하게 되는데 진주임씨(晋洲任氏) 12世孫 諱 광좌(光佐)는 익산파조(益山派祖). 광우(光佑)는 고산파조(高山派祖). 광필(光弼)은 전주파조(全州派祖). 15世孫 諱 ()은 관동파조(寬洞波祖), 17世孫 諱 동노(東老)는 김제파조(金堤派祖), 18世孫 諱 득망(得望)은 논산파조(論山派祖)로 이는 개인적인 부분이 개입되어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어른들께서 후손들에게 우리는 헌납공(獻納公) 자손(子孫) 숙계공파(淑溪公派)로 전해온 것은 필자도 듣고 자라왔다. 그러나 진주임씨(晋州任氏)에 대한 고증자료를 10여년간 확인해 보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고려때 좌복야(左僕射)를 지내신 덕생(德生) ()가 진주임씨(晋州任氏) 비조(鼻祖)가 되는데 임금으로부터 진주군(晋州君)으로 사관(私官)을 받은 복야공(僕射公) 자손이 되어야 하고 숙계공파(淑溪公派)는 지극히 임의적인 표기라 사료 된다. 1959년 족보에 기록했던 문중의 어른이 생존해 계실 때 필자가 인터뷰를 했을 때 당시 상황은 우리 문중의 많은 부동산 보유에 있어서 세금 납부 할 재정이 없어서 종친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편의상 파를 붙여 세계도(世系圖)에서 나눈 것이라 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파조(派祖)란 중시조(中始祖)를 의미하며 시조 이후 쇠퇴하였던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 즉 쇠퇴한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을 자손들이 추존하여 중시조로 모셨다. 이러한 경우 온 종중의 공론에 따라 추존하게 되는 것이지 어느 한 파의 단독 주장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중이든 자손이 번창 하면 나무줄기에서 여러 갈래의 가지가 뻗어 나오듯 분파하기 마련이다. 어느 선조 때 특출한 형제가 나오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거하는 선조(先祖)가 생기면 그의 후손들은 각각 별개의 파()로 구분된다. 이런 경우 각 파()의 첫 번째 선조(先祖)를 파조(派祖)로 하며, ()의 명칭은 파조(派祖)의 관작명(官爵名)이나 시호(諡號), 혹은 아호(雅號)를 따서 부르거나 그 자손들이 오래 세거한 지명을 따라 부르기도 한다. 파조(派祖)나 파()는 문중의 의견을 모아 대종회(大宗會)에서 승인(承認)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주임씨(晋州任氏)는 현재 6개 파()로 나뉘어 있지만 분파의 사유와 논리, 상식에도 어긋나 있다. 또한, 논산(論山) 지역은 감정공파(監正公派)고 사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진주임씨대종회(晋州任氏大宗會)에서 승인 바 없다. 진주임씨(晋州任氏)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약 1,500명으로 조사 되었지만 2021년 약 3,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만명도 되지 않은 적은 인원의 성씨로 파()를 나누어 이질감과 거리감만 조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를 나누고 파조(派祖)로 모시기 위해서는 파조(派祖)로서의 모실 수 있는 고증자료 제출과 함께 대종회에서 승인 후 파조로서 모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는 종친은 연락 주시길 부탁한다. (연락처 : 010-4723-6100)

 

晋州任氏在京宗親會 事務總長 任和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