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성덕군자라 칭송한 임윤성 선조를 모신 천곡서원
전북 완주군 화산면 종리 천곡마을에 뒷산인 장군봉(귀두봉)의 품에 안겨있는 이 서원은 임윤성 선조를 모시고 있다. 현재 진주임씨 27세손인 임병교(73)씨와 후손들이 서원의 관리 및 선조의 향사를 주관하고 있다. 진주임씨는 고산현이 생겼을 당시 고산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제주 고씨, 교하 인씨, 기계 유씨, 고령 김씨, 담양 국씨, 나간 오씨, 능성 구씨 등의 8대 성씨 중의 하나로 그만큼 완주군과 역사가 깊다.
천곡서원에 배향된 선조는 원래 고산면 서봉리에 위치한 백현서원에 향사됐었다. 현종 9년인 1668년에 세워진 백현서원에는 구영과 임윤성 두 분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 고종 3년인 1866년 훼철되었고 광무 7년인 1903년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두 선생을 다시 향사하던 중 두 선생의 나이와 술잔을 올리는 문제가 제기 됐다. 임윤성이 구영 보다 37살이 위인데 헌작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진주 임씨와 지방 유림들은 향교에 찬반을 묻는 통문을 보냈고 절차에 따라 두 선생을 나눠서 모시기로 했다.
후손들은 지방 유림의 동의를 얻어 1941년에 현재 위치인 천곡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을 짓고 위패를 백현서원에서 옮겼으며, 1972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강당을 창건하고 1993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손들과 지방의 유림들은 매년 음력 2월 15일이면 선생에게 향사를 올리고 있다.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은 명종 2년인 1547년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후릉참봉을 지낸 임천수(任千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고려조 좌복야문하시중을 지낸 임덕생(任德生)선조가 임윤성 선조의 7대조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일찍부터 독서를 즐겨 학행(學行) 양면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깊었다고 한다. 또 어머니가 병환에 들었을 때 한겨울에 냇물에서 가물치를 구해다 올리는 등 효행이 뛰어나 효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청년시절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해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 이름났었다.
1579년 32세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해 참봉이 되었으며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공부에 힘썼고,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선조 17년인 1584년에 율곡을 홍귀양의 집에서 만나 학문상 의심나는 곳을 문답했는데 율곡이 “임모의 박식은 성덕군자라 이를 만하다”며 칭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중용(中庸) 중 율곡의 견해를 책머리에 적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용학문답(庸學問答)’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성균관 유생의 반열에서 선조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해 신의주까지 갔으며, 이 공로로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다. 이는 평소 효심과 학행문장, 재덕(才德), 그리고 강명정직(剛明正直)한 인격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략 까지를 높이 산 중신들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추천한 사람은 좌의정 유성룡을 비롯해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이정구(李廷龜) 응교(應敎) 신흠(申欽)등이었다고 한다. 전란이 끝난 뒤 선생은 거창현감을 지냈지만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뜻밖의 병을 얻어 사직도 못한 채 1608년 1월 별세했다. 선생의 묘역은 고산면 서봉리 신덕메 방죽 건너 북서쪽 산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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