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晋州任氏) 譜序文(보서문) - 29世 임화영(任和永)

임화영 2020. 6. 15. 13:32

진주임씨(晋州任氏) 譜序文(보서문) - 29세 임화영(任和永)

 

 

 

 

 

 

 

 

나에게 진주임씨(晋州任氏) 본관(本貫)이 풍천(豐川)인데 어찌 진주(晉州)라 하는가 물으면 나 응하여 말하길 대상 고로부터 사람의 성씨가 종은 같고 파가 다름이 없지 않으니 대개 중선세봉채읍(中先世封采邑)으로 인하여 파()는 진주(晋州)가 나누진 것이라 내가 만성보를 안찰한 즉, 만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분파가 전주유씨(全州柳氏)가 되며 여산송씨(礪山宋氏)의 분보가 은진송씨(恩津宋氏)가 되며 김씨(金氏)가 여러 관향이 있으나 경주(慶州)로써 본원을 삼으며 황씨(黃氏)八本이 있으되 창원(昌原)이 조종이 되며 기타 허다한 각 성() 또한 성()은 같아도 본()이 다른 것은 본래 이러함으로써 그러한 것이다.

 

이제 任氏에 관본(貫本) 비록 풍천(豐川)이 나누어 진주(晉州)가 된 것이 또한 어찌 中先祖采邑(중선조채읍)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묻는 자가 그렇겠다 하고 다시 자세함을 연구하여 말하기를 내가 풍천파보(豐川波譜)를 본즉 ()光祿大夫(광록대부), ()()이니 宋紹興府慈溪縣(송소흥부자계현) 사람이라 하고 아들 進士公()可珪(가규)孫尙衣奉御公(손상의봉어공)()()曾孫檢校大將軍公(증손검교대장군공)()()이니 靖康(정강)()을 만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으로 왔다고 한즉 以上 四代中華(중화)巨室(거실)이요, 檢校公(검교공)子 諱()天裕(천곡)이니 비로소 동국에 벼슬하여 고려 贊化功臣(찬화공신)으로 豊海君(풍해군)에 봉하였고 孫御史大夫公(손어사대부공)()曾孫西河府院君判三司公(증손서하부원군판삼사공)子松(자송)이요 玄孫工曹判書公(현손공조판서공)德儒(덕유)豊山君(풍산공)에 봉하였고 次玄孫正順大夫公德壽(덕수)니 벼슬이 판사복사사 (判司僕寺事)요 우리 晋州派譜(진주파보)를 안찰하면 左僕射公(좌복사공 )德生(덕생)이요 晋州君(진주군)에 봉하였으며 檢校公(검교공)后孫이라 하였으니 晋州君豊山君은 동항렬이라 대저 豊山君豊川任氏(풍천임씨)가 되고 晋州君晋州任氏(진주임씨)가 되고 長興君長興任氏(장흥임씨)가 되니 은 같고 이 다른 것이 이에 소소하니 어찌 의심하리요.

 

아름답고 성하도다 任氏의 혁혁한 문벌이여 中華巨室로 다시 東國巨室이 되었으니 아동에 고문거족이 비록 많다하나 누구를 任氏에 비할가 晋州君七世孫 慕齋公(모재공)沙溪門人(사계문인으)으로 博學淵源 (박학연원)이 우리들의 사표가 되었다. 고로 西歸李起(서귀리기)鳳谷(봉곡) 金東準(김동준), 石溪(석계) 崔命龍(최명룡) 으로 三益友直(우직) 友諒友多聞(우량우다문)交友를 삼아 서로 강론하여 익숙히 世德(세덕)派譜(파보)의 뜻을 같이하였다.

 

구보에 西歸(서귀)贊序(찬서)가 있으니 내 비록 고루하고 천견이나 그 로 인하여 따라 느끼고 삼가 기록하여 감히 이어 쓰노라 보라는 것은 그 본종의부터 난바를 나타내며 그 동족으로부터 뻗은 바를 밝힌것이니 집에 보첩있는 것이 나라에 사기있는 것 같으니 나라에 사기가 없으면 그 역대를 알 수 없고 집에 보첩이 없으면 그 昭穆(소목)을 알 수 없느니라. 이로써 나라가 있은 즉 그사기가 없어서는 않되고 집이 있은 즉 그 보첩이 없어서는 않된것이라. 자고로 선철이 혹家風(가풍)을 기술하며 혹 世德(세덕)을 펴고 아울러 글을 나타내여 다능히 스스로 을 함이 있으니 내가 소씨족보 서문을 읽어보니 정은 친한데 나타나고 친한 것은 복제에 나타나며 복이 없는데 이른즉 친이 다하고 친이 다한즉 서로보기를 길가는 사람같이 여기니 서로 길가는 사람같이 한자 그 처음은 형제요 형제 그 처음은 한사람의 몸이니 의당 한사람의 몸이 나누어 길가는 사람같이 여기는데 이르니 우리 족보의 써지는 바라고 말하기를 나누어 길가는 사람같이 여기는데 이른 것은 형세니 내가 어쩔수없지만 다행히 길가는 사람같이 여기는데 이르지않은 처지에는 하여금 문득 잊어 버리지 않게 함이 가할것이라 하였으니 내가 또 되새겨 논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참으로 가히 효제의 마음이 유연히 나온다 말하겠다.

 

속언에 동성(同姓)의 친은 百代의 친이라 하였으니 百代의 친이라 말함은 어찌 一人의 몸이 나누어진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런고로 동성(同姓)은 비록 百代에 이르나 한보첩에 기록하여 꺾이지 않고 내려온 의가 오히려 소원한데서 화합된것이니 진실로 예의국가의 풍화요 윤리의 큰마디라. 누가 효제의 마음이 족보를 보는데 나온다 하지 않으리요. 무릇 우리 진주임씨(晋州任氏)가 본래 풍천(豊川)의 본관으로 나의 十四代祖이신 晋州君으로 封采(봉채한) 邑號(읍호)를 바탕삼아 본을 삼았으며 구보를 안찰컨대 晋州君檢校公后孫이라하였으며 豊山君으로 더불어 동항렬이라 그러나 보첩에 미치지 못한 것은 난리로 인하여 실전하였음이라. 또한 世系를 고찰하여 본즉 獻納公(헌납공) () 竹谷(죽곡)께서 조령의 나이에도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몸을 닦아 뜻을 세우고 충효함과 鄭公夢周(정몽주)趙公胤(조윤)南公乙玧(남을윤)黃公喜(황희)로 더불어 서로 선교가 되여 洪武己巳(홍무기사)黃喜(황희)와 같이 급제하고 또 我太祖(아태조) 왕위에 오르기 전에 뜻을 알아줄 수 있는 처지가 되어 한조정에 벼슬하여 正言獻納(정신헌납)에 이르럿다가 王氏 운이 끝나 매머리를 풀고 통곡하고 몸을 全州에 숨겼다. 太祖登極(태조등극)후에 여러번 불렀으나 끝가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이에 黃喜(황희)를 보내 폐백으로 빙례해서 달래여 함께 벼슬하자고 말하여 가로되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 하니 이 대하여 말하되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정승이 가로되 나라 武王十亂十亂은 열 번 다스림에 靖難靖難은 난리를 진정함에 해함이 없었다 하니 이 말하되 伯夷叔齊(백이숙제)는 어떻하든 고라고 말하시되 정승이 어쩔 수 없이 물러가시고 를 지어 말하되 君有不召臣夷齊後一人”(군유부소신이제후일인) 임금이 부르지 못할 신하가 있으니 伯夷叔齊 후에 또 한사람이로다. 라고 하시니라 뒷날 비록 조정으로부터 매양가난을 구조하여도 끝내 받지 않고 말하되 내가 여기 있으면 불원간 불음에 있으리라하고 드디어 晋州의 산중에 들어가시니 그 산이름은 首陽이라 인하여 종적을 이 산속에 감추고 逸民(일민) 벼슬않고 빠저버린 백성이 되어 자호를 竹谷(죽곡)이라 하시니 이로 인하여 晋州로 관향을 하였다 하니라. 家乘(가승)을 참고하면 獻納公의 묘는 全州 三山에 있다. 獻納公의 지조가 이렇고 또 遺訓이 있으므로 子孫도 또한 聞達을 당세에 구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여 살고 민망함이 없으니라 비로소 松亭이하로 科慶의 이어짐은 많았으나 또한 벼슬의 높은 지위에 나아가지 않음은 진실로 이러한 때문이라.

 

 

우리 가까운 종족(宗族) 인즉 九世祖 光字(광우) 항렬로써 비로소 三派로 나누어 全州, 高山, 益山 等地에 살고 그사이 에 호남, 영남, 충청, 경기, 서울 등지에 나가 살다가 도리어 豊川으로 을 한사람이 많은 즉 어찌 옛날에도 이렇한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구나. 옛날 나의 先君께서 高山의 모든 종씨로 더불어 합보할 것을 경영하였으나 재물의 부족한 소치로 인쇄로 개간할 길이 없어 뜻을 두고 성취하지 못함을 상심하셨으니 뒷자손의 통한됨이 어떻하겠는가 내가 항상 源源에 힘씀을 간절하여 대략 가전(家傳)의 들음으로써 世派에 보여써 뒷 자손의 잘 계술할 자를 기다리노라.

 

 

崇禎 後 壬申 陽月 旣望 後孫 道濡 (29世孫 和永 再拜槿書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