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전라북도 완주군 인물 (역사위인) 소개

임화영 2020. 7. 9. 15:47

전라북도 완주군 인물 (역사위인) 소개

 

 

일반적으로 어느 지역을 논할 때에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지역성을 대변하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한다. 전주는 이성계, 강릉은 이율곡, 안동은 유성룡을 대표적으로 꼽고 있는데 완주군의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해본다.

 

 

 

숙계 임윤성을 배향하는 천곡서원

 

 

 

 

1. 임윤성 任尹聖 (15471608)

 

조선 중기 문신. 자 상경이고, 호는 숙계이다. 본관은 진주이고,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관동(옛날, 고산현)에서 태어났다. 참봉 임천수의 아들이며 진주임씨 시조인 임형의 6대손으로 1579(선조21) 식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어려서 홍귀상의 집에서 율곡 이이를 만나 공부하다 의문 나는 것은 문답을 통해 해결하였다. 중용책머리에는 율곡이 한 말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쓴 것을 보고 율곡이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하여 용학문답을 펴내게 되었다. 율곡은 박식하고 덕까지 갖춘 군자라며 그를 극찬하였다. 성균관 유생 시절 서애 유성룡이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그의 박식함을 보고 율곡에게 빨리 등용하여 그의 재주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이었던 유성룡과 승문원제조 이정구와 응교 신흠 등이 그를 천거하여 선무랑에 제수되자 유생들과 함께 어가를 호종하려고 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를 하며 3년 상을 마치고 1599년 전설사별좌, 선교랑을 거쳐 봉훈랑, 군자감주부, 봉직랑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가 1608년에 경상도 거창현감으로 나가라는 부름이 있어 임지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유림들에 의해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백현사에 배향하여 그의 학식과 인품을 기리다가, 1941년 숙계공의 후손들이 완주군 화산면 종리에 천곡단을 세우고 그의 위패를 옮겨서 배향하rh 있다.

 

 

 

죽유 구영을 배향하는 백현서원

 

 

 

2. 구영 具瑩 (1584~1663)

 

본관 능성이며 자는 영연. 호는 죽유로 김장생의 문인이다. 1584(선조12) 완주군 고산면 백현마을현에서 구대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1612(광해군4)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1623년의 인조반정 후 거주지의 고산현감이 유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다가 1626년 처음으로 활인서 별제(6)를 제수받았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이원익 예하의 호소부사가 되고, 직장, 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1644년 별좌, 감찰을 거쳐 회인현감을 지냈다. 1668년에 창건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위치한 백현서원에 봉안하고 있다. 백현서원은 처음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윤성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1941년 후손들이 위패를 천곡서원으로 옮겨갔고 현재는 구영만 배향하고 있다.

 

 

명창 권삼득의 생가

 

 

 

 

3. 권삼득 權三得 (17711841)

 

정조와 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본명 사인, 본관은 안동.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권내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싫어하고 판소리만 배우다가 양반집안에서 쫓겨났다 한다. 그는 판소리에서 가장 오래된 명창으로 알려진 하은담과 최선달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권삼득은 권마성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를 두고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권생원 사인씨는 천층절벽 불끈 소사 만장폭포 월렁궐렁 문기팔대 한퇴지라 하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흥보가를 특히 잘 하였고 그의 더늠인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은 전도성, 송만갑, 김창룡에 의해서 방창되고 있고 염계달은 그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완주독립기년관 충혼탑 -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

 

 

 

 

4. 국영환 鞠榮煥 (1871193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자는 영화, 호는 곤암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 봉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당시 어장 조영하에게서 병서를 배웠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강한 반일 감정을 키우웠으며, 나중에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에 가담하여 전주와 익산, 연산, 진산, 금산, 논산 등을 누비며 수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78년간을 숨어 다니다 중국 심양으로 망명하였다가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독립운동을 꾀하고자 비밀리에 귀국 하여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5. 전태순 全泰順 (18851961)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창여이고, 호는 의당이며, 본명은 전태섭이다. 본관은 천안이고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출신이다. 중추원의관과 주임관을 거쳐 창릉 정자각을 개수할 때, 감독을 맡은 공으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올랐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9년 독립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 중진 손병희, 이인환, 신석구, 강덕기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각지에 배포하고 민중을 선동하였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며 2년형이 선고되어 복역하였다. 전라북도 완주에 그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 구멍이 패어 있는데 소리구멍이라 하여 그곳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위와 같이 완주군 지역에 훌륭한 위인들이 있어도 아직까지 조명을 크게 받진 못한 것 같다. 더구나 위 인물 외에도 훌륭한 위인들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인은 후손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들을 찾고, 생각하고, 훌륭하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완주군의 위인들을 알릴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도 갖추길 기대하고 후세에 길이 전할 완주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임화영 = koreamag@hanmail.net / 010-4723-6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