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천곡서원(泉谷書院)의 유래와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임화영 2022. 3. 7. 09:45

천곡서원(泉谷書院)의 유래와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천곡서원(泉谷書院)은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화산남로 52-32 있는 서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진주임씨(晋州任氏)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668년 백현서원((栢峴書院)을 지어 조선 중기의 문신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1547년생)과 죽유(竹劉) 구영(具瑩.1584년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나 1866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03년 그 자리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다가 1941년 두 분의 위패의 차례가 잘못되었다는 선비들이 여론을 제기 분단(分壇)하여 1941년 임윤성(任尹聖)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서원을 건립하여 임윤성(任尹聖)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였다. 초대 서원장으로 염당(念堂) 구연건(具然建)을 추대하고 사우중건기적비(祠宇重建紀蹟碑)를 세웠으며 1993년에 건물을 다시 수보 하였다. 경내에는 강당과 사당, 기념비 등이 있는데, 사당은 전면 3, 측면 1칸의 규모이고 제관(祭官)의 숙소로 쓰는 강당은 전면 4,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흠제(欽齊) 최병심(崔秉心) 선생이 쓴 명성재(明盛齋)는 재명성복(齋明盛服)에서 따온 말인데 깨끗하게 차려입은 옷이라는 뜻으로 편액(扁額)하여 달았다는 구영조 선생이 위 사실들의 기록문을 지었으며 매년 음력 215일에 고산향교 유림들과 진주임씨(晋州任氏) 후손들이 함께 향사를 하며 2022년에는 317(목요일)에 진행한다.

 

 

 

 

 

 

 

임윤성(任尹聖)의 자()는 상경(商卿), 호는 숙계(淑溪)이다. 1547(명종 2)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후릉참봉을 지낸 임천수(任千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조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진주군(晋州君)으로 봉() 받은 진주임씨(晋州任氏) 비조(鼻祖) 임덕생(任德生)7대손이며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며 충절을 지킨(晋州任氏) 진주임씨 시조(始祖) 헌납공(獻納公) 임형(任衡)5대손이다. 일찍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즐겨 학행(學行) 양면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깊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공양을 잘 하였으며 모친이 병환에 들었을 때는 한겨울에 냇물에서 가물치를 구해다 올리는 등 효행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어려서 이이(李珥)를 만나 공부하였는데, 중용(中庸) 책머리에는 율곡이 한 말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쓴 것을 보고 율곡이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하여 용학문답(庸學問答)을 펴내게 되었다. 청년시절에 이미 육경(六經)에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설립하여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1579년 그의 나이 32세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었으며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공부를 힘썼으니,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서애(西涯) 유성용(柳成龍)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윤성(任尹聖)은 성균관 유생의 반열에서 선조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신의주까지 갔으며 이 공로로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그의 평소 효심과 학행문장 재덕(才德), 그리고 강명정직(剛明正直)한 인격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략 까지를 높이 산 중신들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를 추천한 사람은 좌의정 유성용을 비롯하여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이정구(李廷龜) 응교(應敎) 신흠(申欽)등이었다. 한편 임윤성(任尹聖)은 거창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관하 백성들 중에 효자 절부(節婦) 행의자(行誼者)가 있으면 몸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직접 포상하고, 자신을 청렴으로써 몸가짐을 하면서 이속(吏屬)들을 단속하니 그의 송덕(頌德)이 자자하게 인근 읍내까지 미풍(美風)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1603(선조 36)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08(선조 41)에 경상도(慶尙道)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나가라는 부름이 있어 임지(任地)로 나갔다가 부임한 지 반년만에 뜻밖의 병을 얻어 사직도 못한 채 16081월 별세하니 고을 사민(士民)들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다음해 정월에 고향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관동 진주임씨(晋州任氏) 선영에 안장되었다.

 

 

晋州任氏歷史硏究院 任和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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