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 시작과 진주임씨대종회의 역할

임화영 2022. 8. 15. 10:40

진주임씨 시작과 진주임씨대종회의 역할

 

 

진주임씨의 시작은 풍천임씨 8세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진주군(晋州君)으로 봉받은 덕생(德生)으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복야공은 고려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상의봉어와 대사성을 거쳐 상도성(尙書省)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고려 공민왕 때에 국가에 발전에 공헌한 공적으로 진주군(晋州君)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충숙왕 때 일등공신으로 서하군(西河君)에 올랐던 백파조(伯派祖) 자송(子松)의 넷째 아들이며 감문위대장군을 지낸 ()의 손자, 상호군지낸 풍해군(豊海君) 천유(天裕)가 조부이다. 고려시대 삼사소속의 종3품 좌윤(左尹)을 지낸 을일(乙馹)의 부친, 조선 초기 이조정랑 헌납(獻納)을 지내시고 충신불사이군이라며 경상도 수양산에서 은거했던 충정공(忠貞公) ()의 조부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부지런하고 몸을 닦으며 충효입지(忠孝立志)하여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圃隱)와 문안공(文安公) 사천(沙川) 남을진(南乙珍), 익성공(翼成公) 방촌(厖村) 황희(黃喜)더불어 친교(親交)를 지내며 홍무을사(洪武乙巳)에 익성공과 같이 급제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낙향하여 있을 때 태조이성계는 학문과 능력이 아깝다하여 황희를 보내 벼슬을 제의하고 여러 차례 불으셨으나 나가시지 않았다. 임금이 폐백을 보내고 황희가 같이 벼슬을 하자고 하며 말하기를 어디를 섬기면 임금이 아니며 어디를 부리면 백성이 아니리요하자 형()이 대답하기를 충신(忠臣)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시니 익성공(황희)이 말하길 주나라 무왕은 열 번 다스리되 의가정란에 해됨이 없다.”하니 형()이 가로되 백이숙재(伯夷淑齋)는 어찌하였는가묻는 말에 익성공이 어쩔 수 없이 물러 가시며 글을 지어 임금이 부르지 못한 신하가 있으니 백이숙제(伯夷淑齋) 후에 또 한 사람이라 하였고 동료들과 임금이 벼슬하기를 여러차례 권유하자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경상도 수양산으로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형()으로 개명하고 장고의 은거활을 하였다가 말년에 전라도 전주지방으로 옮겨와 은신하다가 생을 마쳤으며 사후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다.

 

 

 

 

 

700년 역사를 지녔음에도 진주임씨 인구는 3천명에 불과하다. 이는 많은 종인들이 진주임씨의 뿌리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본관을 찾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적()을 풍천으로 입적한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러나 진주임씨는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단결력에서는 그 어느 성씨도 부럽지 않다. 대종회를 비롯하여 지역종친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1941년 숙계공을 기리는 천곡서원이 세워져 매년 지역 유림들과 함께 향사를 하고 있다. 지난 2016년에 전주시 정여립로에 진주임씨 시조인 충정공을 배향하는 선모재를 준공하여 매년 3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전국있는 진주임씨 종친들이 참석하여 향사를 하는 뛰어난 단결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대종회를 이끌어가는 임헌두 회장은 막중한 책임감이 있는 만큼, 마음도 적지 않게 무거울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진주임씨 대종회는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무엇보다 진주임씨 비조(鼻祖)에 대한 제단비 설립과 선모재에 대한 조경과 완주군 문화재로 등록된 천곡서원의 보수, 민생정치의 모범을 보이고 거창현감을 지낸 숙계공 묘소의 둘레석 설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족보를 정확하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 족보 제작도 당면해 있다. 다행히 선임 임원님들의 노력과 종원들의 전국적인 참여로 대종회 운영의 어려움이 해소되고 전국적인 네크워크도 정비되어가고 있는 기반을 바탕으로 매년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어느 씨족에 뒤지지 않는 대종회로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이다. 진주임씨 대종회는 종원들의 의견을 모아 화목한 대종회, 조상을 잘 섬기는 대종회로 만드는 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진주임씨의 종훈(宗訓)은 숭조상문(崇祖尙門), 종친돈목(宗親敦睦), 후손육영(後孫育英) 이다. 같은 조상의 자손들끼리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자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투지 말고, 화합하면서 모두를 위해 내가 보는 조금의 손해는 기꺼이 감수하며 후손의 바른 길잡이가 되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자손만대가 잘 화합하는 일가로 남으리라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대종회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나라고 반문하는 대신에 대종회 발전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적극적인 마음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지역과 씨족에 기반을 둔 대종회와 같은 커뮤니티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지금도 전국의 대종회들은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지역에서 전문가들도 하지 못하는 문화재 발굴이나 연구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 왜곡된 역사를 재조명해서 바로 세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대종회는 분명 사회 안에서 그 나름의 순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할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도록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장려하는 문화는 우리 곁에 필요하다. 특히 진주임씨 대종회는 종훈의 정신으로 단결하고 있기에 밝은 미래가 전망된다.

(진주임씨대종회 사무총장 임화영 = koreama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