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晉州任氏) 선모재기(先慕齋記)

임화영 2020. 11. 2. 17:53

진주임씨(晉州任氏) 선모재기(先慕齋記)

 

 

 

진주임씨(晉州任氏) 선모재(先慕齋)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정여립로 488-9에 소재하고 있으며 건립함에 있어서 선모재(先慕齋)에 대한 기록이 2개의 액자로 전시되어 있다. 글씨는 부여인(扶餘人) 서춘식(徐春植)이 썼다.

 

 

 

 

 

 

민관 모두 전주를 문향 예향 절향이라 하여 자부심이 대단한 메 바로 이 국내(局內)에 진주임씨 선영이 있어 자랑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600여년간?(700) 지켜온 이 터전이 우리로서 너무나도 소중하여 밟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육신 같은 땅이다. 전주군 우림면 완주군 우전면 완산구 삼천동 이 연혁이 바로 우리 역사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이한 전주 유씨 류습과 함께 진주임씨 임형 3위 시조 묘가 시내에 있어 천년 전주의 명망이 더 한층 높아진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기축사옥 이후 정여립 거명이 어려웠고 묘석하나 설자리가 없었는데 정여립로(鄭汝立路)를 넓고 길게 내어 역사의 기승전결 앞에서 영원불변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실감한다. 고려 망국의 절신과 조선 창업의 개국공신 모두를 역사의 주역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다. 진주 수양산에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시조의 시국관을 우리가 함부로 재단해선 아니 된다. 조상들의 업적과 올바른 역사인식을 대하여 모이고 가르치는 장소가 있음으로 급변하는 시대변화와 젊은 세대들의 무관심속에 자신의 본문마저 잃어버리고 사는 자손들을 위하여 문중의 장래를 걱정하며 대중종 재각 건립을 추진해온 종중회장인 17대손(18)병교, 18대손(19)석동은 196945(?)(200945) 한식날 시제를 모신 후 중종회의를 통하여 재각 건축 문제를 의논한바 참여자 전원이 건립에 찬성하여 적은 재정으로 재각 건축의 어려움을 알고 건축업을 하는 19대손(20) 상영의 희생정신으로 문중 재각 건축에 동참하게 되어 선모재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 선모재가 우리의 현대정신과 과거의 위업을 융합시키는 자리여야 한다. 2016720일 기공하여 201745일 완공까지 실심정력 위대한 종의로 건축비 12천만원을 잘 운용하여 오랜 숙원을 이룩하였다. 남들처럼 청실 누정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모이는 자손마다 숭조동종의 산실로 우뚝 세워나가야 한다. 따뜻한 자리만 찾고 단꿀이나 탐하는 속인과는 다른 모습을 몸소 보여주어야 밝은 여망이 뒤따른다. 이 선모재가 항승재 명성성재와 더불어 불 밝은 밤이 많기 바라며 청년교도진붕우(靑年交道眞朋友)라 했으니 젊은 일가의 만남이 그치지 않아 좁은 선모재를 다시 증축하자는 바람이 일어나면 일어날 수 있도록 이게 발전이다. 종사 서로 전하며 종무확인을 통하여 종중의 힘이 자꾸 커져 만사형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745

 

진주임씨대종회원 일동

 

 

 

 

 

주의 (代孫世孫)

 

성균관 유학에 정의한바에 의하면 는 같은 뜻(同義)이다. 그러나 대조(代祖)와 세조(世祖)는 같고 대손(代孫)과 세손(世孫)도 같은 뜻이지만 시작되는 기준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29世孫 임화영이 아니라 손()을 뺀 29임화영이 올바른 표현법이며 세손(世孫), 대손(代孫)을 붙이 표기하려면 자신을 뺀 28世孫으로 표기해야 한다. 또한 조상님을 표기하려면 자신을 뺀 19代祖 임형(任衡)으로 사용해야 한다.

 

 

晉州任氏29世和永 (晉州任氏28和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