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晉州任氏)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임화영 2020. 11. 3. 09:41

진주임씨(晉州任氏)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임윤성(任尹聖)(1547-1608)本貫은 진주(晉州), 자는 상경(商卿), 호는 숙계(淑溪)이다. 高麗時代 門下市中 임덕생(任德生)의 후손(後孫)으로 임형(任)의 현손, 임천수(任千壽)의 아들이다. 1547(명종2)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일찍부터 독서를 즐겨 학행(學行) 양면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깊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공양(供養)을 잘 하였으며 母親이 병환에 들었을 때는 한겨울에 냇물에서 가물치를 구해다 올리는 등 효행(孝行)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어려서 이이(李珥)를 만나 공부하였는데, 중용(中庸) 책머리에는 율곡이 한 말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쓴 것을 보고 율곡이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하여 용학문답(庸學問答)을 펴내게 되었다. 청년시절에 이미 육경(六經)에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설립하여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 이름나있었다. 1579년 그의 나이 32세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공부를 힘썼다.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서애(西涯) 유성용(柳成龍)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윤성(任尹聖)은 성균관 유생의 반열에서 선조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신의주까지 갔으며 이 공로로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그의 평소 효심과 학행문장 재덕(才德), 그리고 강명정직(剛明正直)한 인격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량까지를 높이 산 중신들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를 추천한 사람은 좌의정(左議政) 유성용(柳成龍)을 비롯하여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이정구(李廷龜) 응교(應敎) 신흠(申欽)등이었다. 한편 임윤성(任尹聖)은 관하 백성들 중에 효자절부(孝子節婦) 행의자(行誼者)가 있으면 몸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직접 포상하고, 자신을 청렴으로써 몸가짐을 하면서 이속(吏屬)들을 단속하니 그의 송덕(頌德)이 자자하게 인근 읍내까지 미풍(美風)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성덕군자(盛德君子)라 칭송한 인물이다.

 

 

 

 

 

 

1603(선조36)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08(선조 41)에 경상도(慶尙道)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나가라는 부름이 있어 임지(任地)로 나갔다가 부임한 지 반년만에 뜻밖의 병을 얻어 사직도 못한 채 16081월 별세하니 고을 사민(士民)들이 매우 슬퍼 하였으며 다음해 정월에 고향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관동에 안장되었다. 현종 91668년에 세워진 백현서원에 구영(具瑩,15841663)과 임윤성(任尹聖, 1547~608) 두 분을 모셨다가 종 3년인 1866년 훼철되었고 광무 7년인 1903년에 지방 유림들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두 선생을 다시 향사하던 중 두 선생의 나이와 술잔을 올리는 문제가 제기 됐다. 임윤성(任尹聖)이 구영(具瑩) 보다 37살이 위인데 헌작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진주임씨(晉州任氏)와 지방 유림들은 향교에 찬반을 묻는 통문을 보냈고 절차에 따라 두 선생을 나눠서 모시기로 하고 후손들은 지방 유림의 동의를 얻어 1941년에 현재 위치인 천곡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곡서원(泉谷書院)을 짓고 위패를 백현서원에서 옮겼으며, 1972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강당을 창건하고 1993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손들과 지방의 유림들은 매년 음력 215일에 향사(鄕祠)를 올리고 있으며 묘사(墓祀)는 매년 음력(陰曆) 1010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晉州任氏淑溪公14世孫任和永, 010-4723-6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