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사적(事蹟) 연보(年譜)
임윤성(任尹聖)(1547-1608)
자(字)는 상경(商卿), 호(號)는 숙계(淑溪), 휘(諱)는 윤성(尹聖), 本貫은 진주(晉州)이다. 진주임씨(晉州任氏) 비조(鼻祖)인 高麗時代 門下市中 좌복야(左僕射) 임덕생(任德生)과 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始祖)인 고려문하성(高麗門下省) 헌납공(獻納公) 임형(任衡)의 후손(後孫)으로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 임천수(任千壽)의 아들로 그의 사적(事蹟) 연보(年譜)를 기록한다.
1세 (1547년-명종2년)
1547년(명종2년) 4월 20일 묘시에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태어났다. 부친 첨추공(僉樞公)이 명명을 윤성(尹聖)이라하였으니 대개 중국 상나라 이윤이로 희망하였다. 관례를 갖춤에 자(字)를 상경(商卿)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뜻을 취했다.
4세 (1550년-명종5년)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일찍이 독서를 즐겼고 희롱하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일반 어린이와는 달랐다.
10세(1556년-명종11년)
소학 읽기를 좋아하고 사람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수신의 대요가 다 이책에 있으니 이 책을 읽지 아니하면 사람의 도리를 알지못하여 살아가면서 어떻게 어버이를 섬길 것이며 조정에 있으면서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였다.
15세(1561년-명종16년)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되 얼굴빛으로 봉양함을 힘썼으며 아침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되 반드시 그 때에 따라 친히 맛보고 부모의 입을 기쁘게 한 후 얼굴이 화하고 따뜻한지 서늘한지 부모의 몸을 적절하게 하고 자신은 잊었다. 부모님이 질병이 있으시면 반드시 저신이 대신하도록 하늘에 기도하니 향리에서 지극한 효성이라 칭찬을 했다.
19세(1565년-명종20년)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근신하며 제모가 풍성하고 후덕하시어 평소애 가정에서의 행동이 주도하고 완비하여 화려함을 버리고 성실하였고 효제충신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큰 방법으로 삼아으셨다. 너그럽되 제한을 두었고 화평하되 흐르지 않으며 학문에 오로지 열중하고 작은 꾀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옛 것을 추모하되 고집하지 않으며 세속에 응하괴 섞이지 않으시었다. 사람을 대하심에 마음을 열러 모두 밝히고 숨김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심에 평안하게 하시고 턱을 만들지 않으시었다. 귀천이나 현우에게 응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언소를 근친하게 하여 빈객이 만좌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으시었다.
20세(1566년-명종21년)
부인 해주오씨를 맞이하였으니 판서 오억령의 딸이며 증판서 붕의 손녀이다.
22세(1568년-선조1년)
육경서의 깊은 뜻과 제자백기의 모든 학설을 궁리하고 탐구하지 않음이 엇어서 강론할 자음에는 분석함이 정미하고 감춰지고 쌓여진 것들을 다 밝혀내고 견해를 제시하고 글을 저술함이 선인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들을 밝혀내시었다.
27세(1573년-선조6년)
아들 섬(暹)을 낳으셨다.
29세(1575년-선조8년)
향리 사람 중 다투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달래고 설명하기를 간절히 그치지 않으셨으니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교화되었다. 비록 어둡고 완고한 자라도 그 악행을 자행할 수가 없었고 혹여 풍속을 무너뜨리는 행실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공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임송께서 내 소행을 알지 않을까 하였다 한다.
32세(1578년-선조11년)
서민이 죄망에 걸리거나 환란에 빠지게 되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제하여 제자리를 잡게하니 착한 자도 그를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자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감화시킨 것이 항상 이와 같다.
33세(1579년-선조12년)
기묘년 봄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하여 첨추공(僉樞公)의 명령으로 성균관에 왕래하였다.
35세(1581년-선조14년)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2월에 모친 장씨 병환이 위독하여 거의 속광에 이르자 임공께서 단지하여 피를 주입함에 다시 소생하였다. 11월에 장씨 모친이 또 유행병이 더하여 의원을 맞이하여 시약을 해본 즉 산 가물치가 아니면 다른 좋은 약제가 없다고 하였다. 때는 혹한기라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었다. 임공께서는 앞 내에가서 울부짖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얼을을 깨고 가물치를 얻어 모친께 드리고 간병을 하던 중 12월 2일에 이르러 세상을 버리셨다. 선생께서 하늘을 보고 울부짖고 땅을 치고 울어 눈물이 마르고 피를 토하니 그것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 소문을 듣고 효심을 일으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36세(1582년-선조15년)
선생께서 거상하심에 슬픔에 지쳐 몸이 훼손되심에 첨추공(僉樞公)이 생명을 보존할까 두려워 슬픔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효도가 된다라고 깨우쳐 주시니 슬픔을 과도하게 않으시고 어버이 마음을 받들어서 집상하시기를 한결같이 예제와 같이 하셨다.
37세(1583년-선조16년)
첨추공(僉樞公)의 명령으로 성균관에 왕래하였다.
38세(1584년-선조17년)
율곡선생을 알현하였다. 일찍이 율곡선생님을 홍공 귀상 집에서 알현하고 어렵고 의심나면 문답에 언동과 지식이 조금도 구차함이 없으니 율곡선생게서 좌우를 돌아보고 말쓴하시기를 임윤성의 박식함이 가히 성인군자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 만남이 이처럼 늦었는가 하시며 칭찬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rm 후에 중용과 대학의 미묘하고 말하기 어려운 뜻에 율곡의 말씀으로 서두에 열서를 하고 사이에 자기 생각을 붙여 율곡선생께 드리니 보고나신 뒤 가상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한 권의 책을 베껴낼만하다. 하시고 그 책 이름을 용학문답이라 명명하시었다. 그 후에 왕래하며 강론하심에 매번 성리설의 변의가 있으시면 율곡선생께서 선생에게 그것에 대한 질의가 있으셨다.
40세(1586년-선조19년)
아들 진(進)을 낳으셨다.
41세(1587년-선조20년)
선생이 성균관에 계실 때 유공 성룡이 당시 대사성으로 성균관에 왕림하여 육경에 깊은 뜻과 이기설의 미모함을 강론할 때 물으면 대답하기를 정밀히 분석하고 요연하게 하니 유 상공이 심히 존경하였다. 유 상공이 일찍이 율곡선생과 더불어 당시 기특한 재능인을 논할 때 유 상공이 선생을 율곡선생에게 칭허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마땅히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으니 그 재능과 덕성을 시험해 봄이 옳다고 하셨다. 후에 유 상공이 추천한 주인공이 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43세(1589년-선조22년)
정여립 모반이 일어나자 상소하였다.
46세(1592년-선조25년)
2월에 경성에 도착하여 성균관에 거쳐하셨다. 경성에 오기 전 아우 여성으로 하여금 어버이르 모시고 권속을 인솔하여 바다를 건너 오죽도에 거처하게 하고 선생은 단신으로 경성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을 칭찬하였다. 역시 그는 효행을 옮겨서 충성을 다한 높은 절개를 복행한 것이다. 4월에 왜적이 난을 일으키니 선생은 성균관 유생을 따라 호종하시니 선무랑에 재수되었다. 당시 죄의정인 유성룡과 승문원 제조인 이정구와 응교인 신흠 등 제공들이 선생이 본래 효제학행 문장재력 강명정직을 소유하고 경제 재력을 전비한 연령이라 여겨서 궁궐에 천거하여 선무량에 제수되었다.
50세(1596년-선조29년)
9월에 제원찰방에 제수되었으며 첨추공(僉樞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52세(1598년-선조31년)
집상하는 예제는 한결같이 모친상과 같이 하였다. 여묘살이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고 슬픔이 지나치어 마른 나무처럼 훼손되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 못할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복이 장차 마치려함에 부르는 왕명이 여러번 내려왔다.
53세(1599년-선조32년)
7월에 전설사에 제수되었다가 선교랑에 승진되었다.
55세(1601년-선조34년)
1월에 사도시 직장에 제수되었다가 8월에 승훈랑에 승진되었다.
56세(1602년-선조35년)
2월에 승의랑에 승진되었다가 3월에 봉훈랑에 승진 되었고 4월에 군자 감주부에 제수되고 7월에 봉직랑에 승진되었다.
57세(1603년-선조36년)
5월에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선인의 허술한 집을 수리하고 지붕을 이어서 인재를 기르고 간간이 거문고와 서책으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을 교육함에 반드시 입지로써 우선을 삼고 몸소 실행함으로 급선무를 삼아서 순수히 차례를 두어서 선도하기를 게을리 아니하고 사람의 재능과 품격에 따라 정성으로 개도하였다.
62세(1608년-선조41년)
6월에 조산대부에 올라서 경상도 거창현감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임명을 받고 얼굴빛이 변하여 말하기를 선고 선비께서 이미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이미 부모님을 영화롭게 봉양할 바람도 멀어졌고 내 나이도 육순이 지났으니 역시 충성할 길도 없으니 충효 두 가지는 다 잃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벼슬길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이때 임금님의 듯이 너무 다정스럽게 파발을 보내어 부임하기를 재촉한 영고로 억지로 관사에 다다르니 병화는 겨우 안정되었지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연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 운이 불행하여 남족 오랑케가 들어와 난을 일으켰으나 명나라 신종 황제께서 멀이 여기지 않는 은혜을 업어서 난리가 초기에 정리되었다. 동방은 어찌하여 하늘고 돕지않고 백성들도 복이 없는가. 또 국상의 슬픔을 당하여 온나라가 망극하였지만 새 임금께서 현명하시어 주공과 소공의 다스립으로 거의 오늘날을 만난 것이다.
아! 여러 그대들은 각자 농사와 길쌈을 힘써서 봉양을 잃지 말고 교육을 권장하여 반드시 자제들에게 직분을 주어라 하고 붉은 글씨로 권 농상편과 여씨 향약 절목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게하고 등서를 하여 돌려 보내기로 하고 언문으로 번역하여 보내기러 하며 말하기를 아! 여러 그대들은 분명히 내말을 들어라! 사람이 낳서 처음에는 현명하고 어리석음 구별이 없고 가르침이 있고 없는 사이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인륜의 절차가 있으며 선각자가 후각자를 깨우쳐 줌이 없고 선지자가 후지자를 깨우쳐줌이 없으면 그 진실을 알고 진실로 능한자가 적을 것이다. 또 학문은 여가게 하는 일이라 말하지만 안일하게 거처만하고 교육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지느니라.
아! 여러 그대들은 돌아가서 자제들에게 주어서 이 책과 소학 한 질을 갖게하여 한사람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한사람도 가르치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오늘 한가지 일을 행하게 되고 내일에 함 가지 일을 터득하게 되어 날마다 저 책 속에 성인들과 더불어서 글 뜻을 익히고 정조있는 행실을 본받아서 선행을 보면 자기가 소유한 것을 같이하고 남의 악행을 들으면 자기가 잃은 것 같이 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가정에서 수양하고 세상에 행실하여 빠르게 확산되어 군자가 사람을 만드는 지역으로 돌아간다면 비록 순자는 될 수 없어도 오히려 근칙하는 선비는 될수 있으라. 또 옛말레 이르기를 황금이 광주리에 가득 차 있더라도 한 권의 경서를 가름만 못하다 하였으니 뜻이 있는 말씀이로다. 대학에 또 말하기를 평범한 백성의 준수한 자가 다 대학에 입학한다 하니 자제의 지혜롭고 빼어난 자를 독서하고 강학하도록 가르치고 명령하여 선왕의 예법 가르침을 알게하여 우리나라 인재가 풍성하게 이르게 한다면 아름답고 아름다울 것이니 자네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또 효도하는 자식과 절개있는 부인과 의로움을 행하는 자를 찾아서 신속하게 보고하여 포상하고 아랫사람을 은혜와 믿음으로 의무하고 자신을 청렴하고 검소함으로 자율하면 예약 교화가 힘입어서 저욱 진작하여 한 고을이 융흡하여 모두 부모에게 효경하고 골육을 자애하고 향리가 화목하며 공법을 두려워하고 봉사와 글쌈을 힘쓰고 권면할 줄 알아야 백성들은 어둠이 오는 탄식이 있고 선비들은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기쁨이 있어서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이웃 고을에 파급되리라. 하셨다.
선생이 관직에 부임한지 수 개월이 되도록 송사하는 법정에서 채찍과 몽둥이 사용은 하지 않았고 그들을 나무라고 깨우쳐 주어 범죄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반성하게 하였다. 어떤 백성이 불효자가 있었는데 어머니를 집에 발걸음을 못하게 하여 그 어머니가 당직하는 군막에 와서 기숙하고 있었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을 보내어 아들을 오게하고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하례하여 말하기를 너는 변방에서 생장하였는데도 능희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간에 화목하는 도리를 알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어머니를 봉야하는 절차와 사람을 접대하는 방법을 열거하여 그를 깨우쳐주니 그 사람은 엎드려 사죄하고 문을 나가 군막에 가서 어머니를 업고 돌아가서 드디어 효자가 되었다 한다.
선생께서는 관직에 계시면서도 항상 문을 닫고 독서를 하며 하급관리로 마음에 번뇌하지 않도록 하였다. 일에 임헤서는 정밀하고 투명하게 처리하였으며 말을 입에서 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업무를 잘 다스리니 간사한 관리와 관계자들이 심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탐욕하는 지아비가 청렴해지고 완악한 자들이 착해져서 서로 더불어 형법에 접근할까 경계하니 큰 교화바람이 있었다.
62세(1608년-선조41년)
11월 7일 병환으로 생을 마치시었다.
병환이 심하신데도 정신은 변함이 없으시고 의원에게 사례하여 말하기를 내 병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하고 수고하고 왕림함에 많은 사례를 하였다. 아들 섬을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예절에 의하여 선영 곁에 반장하라 하였다. 섬이 답하여 아뢰기를 신색이 변함이 없으신데 어찌 말씀을 여기에 이르십니까 말하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니 성현께서도 면치 못하는 바니라. 나는 곧 인간사는 다했으니 다시 무슨 ㅇ한이 있으리오. 오늘 내가 죽은 것이다라고 하시더니 그 말씀과 같이 돌아가셨으니 향년62세였다.
부음을 듣고 고을의 관리나 백성, 높고 낮음없이 젊은이나 어른 할 것 없이 힘을 다하여 상사에 임하여 기년복과 공복을 입는 것을 같이하며 여러날 떠나지 않고 목동이나 노복에 이르기까지 또한 고기를 목지 않고 말하길 우리 고을이 복이 없어서 현인이 서거하셨다라 하였다. 그 해 12월 고향 집에 돌아와 빈소를 마련 하였다. 발인하는 날에는 온 고을의 종유하던 선비와 소문을 듣고 차장온 농부들까지 모두 모여서 울부짖으며 제수를 올리고 슬픔을 극진히 하며 만장에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돌를 세워 덕행을 칭송함에 칭찬이 입으로는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관동에 위치해 있으며 묘제 享祀(향사)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진행되고 있으며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41년 천곡서원(泉谷書院)을 건립하여 백현서원에서 선생의 위패를 옮겨와 봉안하였다.천곡서원(泉谷書院)은 1941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천곡서원(泉谷書院)을 짓고 1972년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강당을 창건하고 1993년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강당과 사당, 기념비 등이 있으며 사당인 명성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고산향교(高山鄕校) 유림들을 비롯하여 각계 기관장들과 진주임씨(晉州任氏) 후손(後孫)들에 의해 해마다 음력(陰曆) 2월 15일에 향사(享祀)를 하고 있다.
(淑溪公14世孫任和永, 010-4723-6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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