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씨(任氏)는 풍천(豊川), 장흥(長興), 진주(晋州), 곡성(谷城), 과천(果川), 아선(牙善), 회덕(懷德), 함풍(咸豊) 등이 전해지나 그 가운데 풍천임씨와 장흥임씨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진주임씨(晋州任氏)는 풍천(豊川)씨와 같이 시조(始祖)는 본래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高麗) 때 은자광록대부 (銀紫光祿大夫)에 오른 임 온 (任 溫)이다.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溫)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豊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溫)의 6세손(世孫)인 주(澍)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자송)와 중파(仲派:자손)로 크게 나뉘며 두 파(派)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진주임씨(晉州任氏) 시조 10世孫인 임형(任衡)은 여말 선초의 인물로 초명은 충(衝)이며 호는 죽곡(竹谷)이다. 고료 말엽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 헌납(獻納)을 역임하였고 고려의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함에 벼슬을 그만두고 경남 진주(晉州)의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조정에서 나아가 일하기를 권유하면서 이르기를 “어디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 하니 공이 답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요.”라고 하면서 절의를 지켜 수양산에서 이름을 바꾸고 옛 임금을 사모하ㅈ다가 끝내 몸을 마쳤다. 사후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내렸다. 공이 진주에 은거함으로써 자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하여 시조로 삼았으며 1752년(영조28년)에 형(衡) 아들 유도(有度)에 의해 진주임씨(晉州任氏) 틀을 잡았다.
진주임씨(晉州任氏)는 임주의 아들대에서 서하군(西河君) 자송(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 자순(子順)에서 백파(伯派) 중파(仲派)로 나뉘어졌는데 양파에서 고루 인물이 배출되어 조선조에서 문과급제 144명, 상신1명, 호당6명, 청백리2명, 공신1명, 장상3명을 배출되었으며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임헌회(任憲晦) 등 수많은 석학(碩學)이 줄을 이는 뛰어난 명문이다.
자송(子松)은 백이정(白以正)의 문인(門人)으로 조 적(趙 積)의 난(亂)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下府院君)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자송(子松)의 6세손인 원준(元濬)은 당대의 명관(名官)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진 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사홍(士洪)은 한어(漢語)에 정통하고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두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조선(朝鮮)에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또한, 열(說)은 자송(子松)의 8세손으로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에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자손(子順)의 7세손인 유겸(由謙)은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공조판서(刑曹, 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人物)들이 배출되어 진주임씨 (晋州任氏)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유겸(由謙)의 아들 추(樞), 권(權), 병(柄)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추(樞)는 대사간(大司諫)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고, 권(權)은 이조 정랑(吏曹正郞)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관찰사(觀察使) 및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막내인 병(柄)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및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才質)을 보였다.
추(樞)의 아들로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호신(虎臣)과,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른 보신(輔臣), 현감(縣監)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낸 내신(乃臣),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대(代)를 이어 훌륭한 진주임씨 (晋州任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의 몸으로 국가(國家)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승(義僧)을 이끌고 왜병(倭兵)에 대항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子順)의 6세손으로 본명(本名)은 응규(應奎),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이외에도 재사9才士로 이름난 광(光)은 감찰(監察) 익신(翊臣)의 아들이며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 참판(刑曹參判)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목동가 (牧童歌)를 지은 유후(有後)도 예조 참판(禮曹參判) 관찰사(觀察使) 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문에 뛰어난 8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배종(陪從)한 뒤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편찬에 참여한 한백(翰伯), 문장과 글씨가 탁월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명성을 얻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기로소 (耆老所)에 들어간 홍망(弘望)과 대사성(大司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방(枋) 등은 명망 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근세(近世)의 명필(名筆)로 형조 참판(刑曹參判) 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수적(守迪),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고금의 시가9詩歌)에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정(珽),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大家)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성주(聖周)와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觀念)으로 통일하여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정주(靖周)는 형제(兄弟)학자로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 까지 이름을 떨쳐 명문인 진주임씨(晉州任氏)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진주임씨 (晋州任氏) 선조는 全北 전주시 삼천동에 위치한 원삼산에 모셔져있고 21世 선조부터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 일대에 모셔져 있으며 진주임씨 (晋州任氏)의 15世 尹聖(윤성) 號가 숙계(淑溪) 글과 학문이 뛰어나시어 율곡 이이先生의 스승이시기도 하며 조정관직에도 엮임 하신 선조의 호를 따서 淑溪公派로 이르게 되었다.
(29世 任和永 : 연락처 010-4723-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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