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晉州任氏(진주임씨) 淑溪公(숙계공) 任尹聖(임윤성) 墓碣銘(묘갈명)

임화영 2020. 8. 31. 17:30

 

 

晉州任氏(진주임씨) 淑溪先生墓碣銘(숙계선생묘갈명)

 

 

墓碣銘(묘갈명)이란 묘비(墓碑)에 새겨진 별세한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이다. 晉州任氏(진주임씨) 淑溪(숙계) 諱任尹聖墓碣墓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관덕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趙郡(조군) 소수중(蘇洙中)178910월에 墓碣文을 작성하였다. 소수중(蘇洙中)本貫晉州이며 叔行(숙행)이고 1735益山에서 태어나 1774(영조50) 式年試(식년시) 生員(생원)225위로 合格人物이다. 다음은 淑溪(숙계) 諱任尹聖(임윤성)墓碣銘을 한글로 번역한 碑文이다.

 

 

숙계공 임윤성

 

 

 

 

고산골의 선비들이 향선생으로 단소를 봉하여 제사할 만하다고 승상하여 논의하였으니 任淑溪(임숙계) 선생이다. 저는 마음으로 그 분을 본받으려 한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금년 봄에 任氏(임씨) 儒生(유생) 慶烈(경렬)이라는 분이 그집 손님 李度忠의 소개로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옛날부터 묘에는 묘표가 있으니 대저 묘표라는 것은 그분의 행적을 표기하여 비석에 새기어 묘지 옆에 게시하여 지나가는 행인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래토록 잊지 않게 함이니 어여삐 여기시어 묘표를 지어 임씨의 후손된 자들에게 볼 수 있도록 부탁 하거늘 저는 행적을 길이 보존할 만한 사람이 못되어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행장의 내용이 수천여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정성스럽고 변화됨이 없으니 가히 淑溪(숙계)라는 호칭을 증험할 수 있었다. 尹聖(윤성)이고 자는 상경이며 임선생의 본관은 진주이다. 고려조의 문하시중 德生(덕생)이 시조가 되고 손자이인 竹谷公(죽곡공)()이시니 사간하는 신하로서 배재를 당했지만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진술하였다. 敦勇公(돈용공)諱有道(유도)承議公(승의공)(수현)司直公(사직공)光佑(광우)僉樞公(첨추공)諱千壽(천수)는 죽곡공의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이다. 僉樞公(첨추공)께서는 학문을 좋아 하시고 시를 잘 지어 처음에 寢郞直(침낭직)에 보직 되시었다. 그 부인은 방씨부인이시니 유순하여 덕행에 어긋남이 없으셨다.

 

 

 

숙계공 임윤성의 묘갈명

 

 

 

 

 

嘉靖(가정) 정미년 420일에 ()을 고산 주남리 집에서 낳으셨다. ()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셨으며 친압하고 희롱을 하지 않았으며 점점 성장하면서 글 읽기를 좋아하니 자식의 직분을 공손히 하시니 부모님께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더욱 법도를 따르도록 권장하니 고향사람들이 가업을 잘 이어나갈 자식이라고 칭찬하였다.기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전념하니 국자장인 서애 柳 文忠公(문충공-유성룡)께서 공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일찍이 율곡 文成公(이문성공)을 홍구상(洪龜詳-상원군수)의 집에서 뵙고 긴 시간이 지나도록 강론하고 질의 하시니 문성공께서도 자주 칭찬을 하시었다. 이때부터 문성공을 따라 학문을 구하고 이로 인해 용학문답이란 한 권의 책이 있게 되었다.

 

신사년(1581) 봄에 모친께서 병환이 있으심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들게하여 효험이 있었다. 겨울에 또 병환이 있으셔서 얼을을 깨고 가물치를 구하여 병을 낫게하셨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슬픔에 지나쳐 몸을 보존할 수 없게 되자 부친이신 僉樞公(첨추공)께서 생존해 계셔 염려되어슬픔을 억누르고 상을 마치시었다. 임진란에 유생을 따라 용만으로 임금님을 호종하고 있는데 왜구가 호남의 좌협을 치열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조정의 의론에서 濟原察訪(제원찰방)을 얻기 어려운 인재라 하여 서애(西厓-유성룡)月沙(월사) 李公(이공-李廷龜(이정귀), 象村(상촌) 申公(신공-申欽(신흠)께서 공의 학식과 재능이면 위급한 일을 해결할 것 이라고 상서하여 천거하니 곧바로 벼슬을 내리셨다. 공께서는 감히 사양을 못하고 극도로 피폐된 백성들을 무마하기를 심히 차서가 있게 하셨다. 얼마 후 僉樞公(첨추공)의 상을 당하여 () 곁에 여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예제를 극진히 하였다. 상복을 마치고 멀리 떠날 뜻이 있어서 깊숙한 곳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계도하며 거문고와 책을 한가로이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려 했는데 그 사이 典設別坐(전설별좌)司導直長(사도직장)軍資主簿(군자주부)의 관직으로 부르셨다. 무신년(1608, 선조41) 여름에 거창현감으로 제수되었는데 때마침 국가에는 큰 근심거리가 있어서 현감의 관직에 일이 많았다. 힘을 다하여 부임하여 거처한 지 한 달 만에 감화가 크게 행하여져 고을의 여러 유생들이 효제 충신의 학문을 독려하고 계도하여 몸소 전포하고 솔선하기를 권장하니문학하는 선비들이 송연히 보고 느껴서 감흥을 일으키었다. 백성 중의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위해줌울 알지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인륜은 떳떳함을 진술하고 설명하여 그들을 깨우치게하여 마침내 감화하여 효도하는 아들과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이해 117일에 병환으로 과나에서 졸하시니 선비와 백성들이 친척처럼 슬퍼하고 농민과 노예들은 맨밥을 먹고 상복을 입었으며 발인 날에 미쳐서는 콧물과 눈물이 엉기어 젖었으며 만장과 제를 지내고 곡하는 자들이 여러군에 이르러서 길이 막히어서 곧장 갈 수가 없었다. 기유년(1609) 123일 고산 내산동 선영아래 병좌에 돌아와 장사를 지냈다.

 

 

 

숙계공 임윤성의 묘

 

 

 

 

숙인(淑人) 해주오씨는 習讀(습독) 諱吳億齡(오억령)의 따님으로 공보다 4년이 늦은 경술년에 낳으셨다. 온화하고 은혜로워 부덕이 있으셨다. 21년를 낳으셨으니 장남은 섬이고 차남은 진이다. 따님은 將仕郞(장사랑)을 지낸 諱蘇基命(소기명)과 혼인하였다. 장남 섬은 諱李爗(이엽-공조정랑)의 따님과 결혼하여 아들은 태원이고 따님은 韓啓業(한계업)과 혼인하였다. 차남 진은 지향과 조행에 있어 능희 선인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으니 유지평 정이 묘지명을 지어 칭찬하였다. 조극신의 따님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장남은 회원이고 차남은 명원이며 따님은 諱李運海(이운해)와 혼인하였으며 도각민의 따님과 繼娶(계취)하여 낳은 장남은 신원이고 차남은 정원으로 선전관이며 삼남원 팔원이다. 따님 세분은 유필흥과 최준상, 유만기와 혼인하였다. 蘇基命(소기명)은 계자가 있는데 필혜이고 삼녀이며 송이징과 이광현, 김창영에게 출가했다. 증손과 현손은 많으나 다 기록치 못하였다.

 

지금 와서 墓碣銘(묘갈명)을 부탁한 분은 諱慶烈(경렬)이니 諱信元(신원)曾孫(증손)이다. 지금 공께서 세상을 하직하신지가 갑자년이 세 번 돌아왔다. 옛날 집안의 문헌이 거의 없고 거창에 임직하셨을 때의 백성들을 훈계하신 말씀이 행장 가운데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거의 수백 말씀이시다. 그 교육하는 규범 또한 칠팔조목으로 되어 있어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고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고령 진씨의 선거땅에서 교육한 것과 남전 여씨의 향리와 약속한 것에 비유하여도 지극히 상세하고 더욱 더 간절하며 그 정사를 한 것들도 또한 몸소 실행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고 흥기시키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으셨다. 자주 충신 효자 절부 열녀인 사람을 찾아서 포상하여 모범을 보이니 그 우매하여 감화하지 않는 자도 또한 그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그 길을 따라 선인으로 옮기고 허물을 고쳐서 자신도 모르게 한 경애가 모두 화합하였다. 대개 공께서는 小學(소학)을 교본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일하는데 시행하는 것으로 삼아서 이것을 따라 행하니 보고 느끼는 자가 가정으로부터 마을로 고을로 이와 같이 하였다. 국조 이래로 학문을 연구하고 재능과 계략있는 선비들이 인조대왕의 덕화의 지음에 당하여 이때에 가장 융성하였고 율곡과 서애 두분이 이들의 영수가 되었다. 두 분 선생의 목하에서는 선비라 여겨지기가 어려웠는데 칭찬하고 알아주고 발탁됨에 이에 공께 돌아가니 니는 곧 고어에 말하기를 그 산을 보지 말고 그 나무를 보라 하였으니 또한 공의 존재된 바를 가히 상상해볼 수 있었다.

 

 

 

 

숙계공 임윤성을 배향하는 천곡서원

 

 

 

 

애석하게도 그 늦게 음덕으로 벼슬길에 나나가게 되었으나 하위직에서 고적하게 되어서 능히 지향한 사업을 궁구할 수가 없었다. 여섯 달의 정치를 하였으나 능희 돌아가심을 통곡하게 하고 돌에 새겨 칭송하였으며 고향에서도 역시 숭상하는 의론이 끊이지 않음이 있으니 이는 곧 가슴에 쌓여 있는 포부를 사용해 보지 못한 것을 거의 추측할 수 있다. ! 아름답도다. 여기에 명을 이었으니.

명에 말하기를 율곡선생께서 학문을 좋아한다라고 칭찬하셨고 서애(柳成龍)선생께서 얻기 어려운 인재란 말씀을 주셨으니 명경처럼 비추어 보셨으니 응당 옳게 보셨으리라. 가시밭처럼 험난했던 지역에는 글 읽는 소리가 아직도 전해지거늘 고향에서 경건함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산동 깊숙한 곳에 봉분이었으니 산은 높다할고 물은 멀리 흐르도다. 내가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은 墓碣銘(묘갈명)을 기술할 수 있음이로다.

 

정조13(1789) 10월에 趙郡(조군) 소수중(蘇洙中)이 찬하노라.

 

 

晉州任氏 淑溪公 諱任尹聖14世孫 和永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