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晋州任氏)의 유래(由來)

임화영 2020. 12. 13. 11:38

진주임씨(晋州任氏)의 유래(由來)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는 풍천임씨(豊川任氏)와 같은 임온 (任溫)을 보계하고 있으며 ()6세손(世孫)()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대()에 와서 백파(伯派:자송)와 중파(仲派:자손)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자송(子松)은 백이정(白以正)의 문인(門人)으로 조적(趙積)의난()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下府院君)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자송(子松)경유(景儒), 덕유(德儒), 덕수(德壽), 덕생(德生) 4형제를 두었으며 四男인 문하시중좌복야(門下侍中左僕射 : 2)를 지낸 덕생(德生)이 진주군(晋州君)으로 봉해졌으며 이때 풍천임씨(豊川任氏)에서 진주임씨(晋州任氏)로 분관(分貫)되었다.

 

 

 

 

 

 

진주군(晋州君) 덕생(德生)은 좌윤(左尹 : 3)을 지낸 을일(乙馹)을 두었으며 을일(乙馹)은 고려말 이조정랑(吏曹正郞), 헌납(獻納)을 지낸 ()을 두었다. 임형(任衡)은 고려말 인물로 초명은 충()이며 호는 죽곡(竹谷)이다. 고려 말엽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헌납(獻納)의 벼슬을 하다가 조선 태조(太祖)가 들어서자 벼슬을 그만 두었다. 방촌(尨村) 황희(黃喜)가 함께 새 조정에 나아가 일하기를 권유하면서 이르기를 "어디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요" 하니 공이 답하기를,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이며 비록 주()나라는 가난하였지만 폐물을 펴만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고사(古事)만 인용하여 황희(黃喜)를 부끄럽게 하였다. 후일 태조(太祖)는 정승(政丞)이 된 황희(黃喜)를 다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진주(晉州)의 수양산(首陽山)에 자취를 감추고 형()으로 개명하였다.

 

 

 

 

 

임형(任衡)은 진주(晋州)의 수양산(首陽山)에서 다시 전라북도 전주지방으로 옮겨와 은신하다가 생을 마쳤으며 사후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다. 자손들이 진주(晋州)를 관향으로 두고 ()을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로 삼고 있다. 진주임씨(晋州任氏)6개파로 분파(分派)되어 있으며 12世 官承議郞 諱수현(秀賢)四兄弟 長男 諱광보(光輔)无后하고 次男 諱광좌(光佐)를 익산파조(益山派祖), 彰信校尉副司三男 諱광우(光佑)는 고산파조(高山派祖), 生員參奉 四男 諱광필(光弼)를 전주파조(全州派祖), 15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낸 윤성(尹聖)의 둘째아들 ()을 관동파조(寬洞派祖), 18世 諱동로(東老)를 김제파조(金堤派祖), 19世 諱득망(得望)을 논산파조(論山派祖)로 모시고 있다.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는 전주시 완산구 정여립로 석산에 모셔져 있으며 입구에 진주임씨(晉州任氏) 후손들에 의해 2016년 선모재(先慕齋) 건립하고 매년 한식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선모재(先慕齋)는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 ()을 배향하는 재실이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정여립로 488-9에 위치해 있으며 진주임씨(晋州任氏) 후손들의 문중 재정으로 건립되었으며 콘크리크 구조에 기와를 올려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건물 정면에 4개의 원기둥을 세워 웅장감을 표현하여 201683일 준공되었으며 2019여름에 주련을 설치 하였으며 주련사는 不事二君 行忠節, 永慕先祖 礎石固, 忠孝之魂 連後孫, 立齋勝地 覺心彫(선조들의 의지를 기리고, 우리 후손들이 본받아 삶의 도리를 알고, 효도하고 서로 우애하며 살자)는 의미를 담아 豊川任氏27世孫/晋州任氏18世孫 임영(任詠)이 지었다.

 

 

(豊川任氏28世孫/晋州任氏19世孫和永 再拜槿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