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정치인이 본받아야 할 인물 –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임화영 2021. 1. 28. 10:49

정치인이 본받아야 할 인물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임윤성(任尹聖 1547.4.201608.11.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자는 상경(商卿), 호는 숙계(淑溪)이다. 62세에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라 거창현감에 재수된 인물이다. 이율곡 선생을 뵙고 중용과 대학에 관한 학습서를 보이자 용학문답이라 이름 하였다. 이에 앞서 율곡은 박식함이 가히 성인군자인데 늦게 만나 아쉽다.”고 하셨다. 16086월에 거창현감 임명을 받고 얼굴빛이 변하여 말하길 부모님이 하직을 하였으니 봉양할 길도 멀어졌고 내 나이 육순이 지나서 역시 충성할 길도 없어서 충효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벼슬길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임금님의 뜻이 너무 다정스럽게 파발을 보내주어 부임하기를 재촉하여 거절치 못하고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관사에 다다르니 병화는 겨우 안정되었지만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에 여러 연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 운이 불행하여 남쪽 오랑케가 들어와 난()을 일으켰으나 명나라 신종 황제께서 가까이한 은혜를 입어 난리가 초기에 정리되었다. 동방은 어찌하여 하늘도 돕지 않고 백성들도 복이 없는가. 여러 그대들은 각자 농사와 길삼을 힘써서 부모의 봉양을 잃지 말고 교육을 권장하여 반드시 자제들에게 직분을 주어라 하며 붉은 글씨로 권농상편(勸農上篇)과 여씨향약 (呂氏鄕約) 절목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게하고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주었다.

 

 

 

 

 

 

 

송사(訟事)하는 법정에서 채찍과 몽둥이는 사용치 않았고 죄인을 나무라고 깨우쳐 주어 범죄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반성하게 하였다. 어느 불효자가 어머니를 집에 발걸음을 못하게하여 어머니는 군막(軍幕)에 와서 기숙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보내어 아들을 관아로 불러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절차와 사람을 접대하는 방법을 열거하여 그를 깨우쳐 주었더니 업드려 사죄하고 곧바로 군막(軍幕)에가서 어머니를 없고 돌아가서 효자가 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임윤성(任尹聖)은 관직에 계시면서 항상 독서를 하고 하급관리의 마음에 번뇌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일에 있어서 정밀하고 밝게 처리하였고 말을 입에서 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업무를 잘 다스리니 간사한 관리와 토호들이 심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환이 심하신데도 정신이 변함없으시고 의원에게 말하길 내 병은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하고 수고스럽게 왕림하지 말라고 했다. 장남 섬()에게 말씀하시기를 염은 관에 마땅하게 하고 예절에 의하여 선영 곁에 반장하라 하였다. 섬이 말하기를 신색의 변함이 없으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하니 숙계공(淑溪公)께서는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니 성현께서도 면치 못하는 바니라. 나는 곧, 인간사는 다했으니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오늘 내가 죽는 것이다 하시고 117일 돌아가셨으니 향년 62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관리, 백성, 높고 낮음없이 젊은이나 어른 할 것없이 힘을 다하여 상사에 임하여 기념복과 공복을 입는 것을 같이하며 여러날을 떠나지 않고 목동이나 노복에 이르기까지 고기를 먹지 않고 우리 고을이 복이 없어 현인이 서거하셨다 하였다. 12월 섬이 집에 돌아와 빈소를 마련하였고 발인하는 날에 온 고을의 종유하던 선비, 소문을 듣고 온 농부들까지 모두 울부짖으며 제수를 올리고 슬픔을 극진히 하며 만장에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609123일 숙계공(淑溪公)의 유언에 따라 고산 내산동 선영 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취은(醉隱) 구대우(具大佑)가 만장에 쓰기를 그대 참사적을 쓰고자 하니 어찌 문장, 학문만 기특하다 이르겠는가. 하늘을 감격케한 효선(孝善)을 어디에서 볼 것인가. 얼음속에서 가물치가 스스로 뛰어 나오는 때라 하셨고 환성(喚醒) 국함(鞠涵)이 만장에 쓰기를 옛 시냇물 빙한기에 잉어가 뛰어 나오니 일찍이 지극한 효성이었고 영남 거찰골레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 어리석은 백성들 향상되었네. 창졸히 수년을 하늘 빌어주지 아니하니 나그네의 영혼으로 대숲 우거진 사당으로 돌아왔네 하였다. 송만(松灣) 국침(鞠沈)은 눈 속 죽순의 유래는 지극한 효성에서 보았네. 각매는 며칠이나 새로운 꽃송이를 나타냈나라 하였다. 많은 만장을 보면 숙계공의 평생의 행실을 알 수 있다. 3월에 숙계공(淑溪公)의 아들 섬()과 진()의 부탁으로 통정대부예산현감 취은(醉隱) 구대우(具大佑)가 행장(行狀)을 찬 하였다.

 

 

 

 

 

 

 

 

숙계공(淑溪公)의 행적에서 지극한 효심(孝心)은 물론 정치인으로서 관직 받는 자세, 내가 왜 필요한가, 국민 이끌 목표, 민생에 대한 각오, 사람의 가치, 자신의 확고한 철학, 국민 설득 논리, 실천사례가 명료하다. 또한 만장에 참여한 많은 정관민들의 찬사를 보며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충절(忠節)을 지킨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 충정공(忠貞公) 임형(任衡)을 비롯하여 현인 정치인 숙계공(淑溪公) 선조들을 보며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진주임씨(晋州任氏)의 진정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晋州任氏 淑溪公 尹聖14世孫和永 再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