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任氏(진주임씨)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 임형(任衡)의 묘갈명(墓碣銘)

임화영 2021. 1. 14. 12:36

진주임씨(晋州任氏) 시조(始祖) 임형(任衡)의 묘갈명(墓碣銘)

 

 

고려문하성헌납죽곡충정공묘갈명(高麗門下省獻納竹谷忠貞公墓碣銘)

 

높으시다 저 천잠산이여 방박(磅礡)한 형체이며 명미한 빛이 있도다. 삼산양지편에 한 언덕이 있으니 그곳이 선생이 머므른 처소이다. 선생의 성은 임()이요 적()은 풍천(豊川)이다. 는 형()이요 호()는 죽곡(竹谷)이며 익호(謚號)는 충정(忠貞)이니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로 상조를 삼다. 어사대부(御史大夫) 는 주()요 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 는 자송(子松)이요 문하시중좌복야(門下侍中左僕射) 는 덕생(德生)이요 고려(高麗) 좌윤(左尹) 는 덕생(德生)이니 그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부지런이하고 몸을 닦으며 충효입지하여 정포은문충공(鄭圃隱文忠公-정몽주), 남병재사천백(南丙齋沙川伯-남을진), 황방촌익선공(黃厖村翼成公-황희)과 더불어 친교를 지내더니 홍무을사(洪武乙巳-1365)에 익선공(翼成公)과 같이 급재하여 문하성헌납이조정랑(門下省獻納吏曹正郎) 벼슬을 하시고 얼마 후 려조(麗朝)의 운이 다함을 알고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전주(全州)로 와서 몸을 숨기시다가 태조(太祖) 등극후에 여러차례 불으시되 가지 않으니 상(-임금)이 폐백을 보내어 마음을 달랬다. 익선공(翼成公)이 같이 벼슬을 하자고 하며 가로되 어디를 섬기면 임금이 아니며 어디를 부리면 백성이 아니리요 하였다. 선생이 가로되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시니 익선공(翼成公)이 말하길 주나라 무왕은 열 번 다스리되 의가정란에 해됨이 없다하시니 선생이 가로되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어찌 하였는고 되묻자 익선공이 어쩔 수 없이 물러 가시며 글을 지어 왈() 임금이 부르지 못한 신하가 있으니 백이숙제(伯夷叔齊) 후에 또 한 사람이라 하시었다. 조정에서 매양 가난을 구조하되 마침내 받지 않고 가로되 내가 여기 있으면 머지않아 또 부름이 있으리라 하시고 진주 수양산으로 가서 은거(隱居)하시고 적()을 진주(晋州), 이름을 형()이라 고치시고 스스로 호()를 죽곡(竹谷)이라 하시었다. 슬프도다 가히 선생의 충의(忠義)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음을 증거(證據)함이라 하도다.

 

 

 

 

 

 

 

 

()는 장수황씨(長水黃氏)시니 ()의 따님이시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받으셨다. 유도(有度)하시니 생원(生員) 돈용교부(敦勇校射)수현(秀賢)하시니 진사승의랑(進士承議郎)이요 호()는 송정(松亭)이라. 광좌(光佐)의 호()는 덕천(德川)광우(光佑) 생원창신교부부사직(生員彰信校尉副司直)하시고 천수(千壽)하니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윤성(尹聖)하니 호()는 숙계(淑溪)요 율곡문인(栗谷門人)이며 생원(生員) 현감(縣監)이니 천고거원(泉谷書院)에 향사(享祀)하시다. 이하는 다 기록치 못하노라, 임우재교(任友在敎-석형의 )가 그 행장(行狀)과 가첩(家牒) 가지고 묘갈(墓碣)을 청하거늘 내 사양하다 못하여 그 사실대로 폄이 우()와 같이 이어 명하여 가로되 위대하다 진주임씨(晋州任氏)여 근원(根源)이 멀고 흐름이 길도다 고려때 벼슬함이 혁혁한 그 성씨(姓氏)로다 국운(國運)이 다하며 수양산에 자취를 감추다 여러번 부르시되 나아가지 않으시니 천만세에 빛나도다.

 

 

檀紀四千三百二年乙酉至月下浣 (1969.11.하순)

晋州姜東熙謹 州徐春植謹書(진주강동희근찬 여주서춘식근서)

晋州任氏28世孫和永再拜